[朴康文 코너] ‘미스 리’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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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9-03-19 00:00
입력 1999-03-19 00:00
“어이 미스 리,커피 한잔 줘.”‘미스 리’는 고개를 들어 동료 남자 사원을 쏘아보았다.남자 사원이 퉁명스럽게 다죄었다.“커피 좀 갖다 달라니까그래.” ‘미스 리’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거기는 손이 없어요? 발이 없어요? 입만 있어요?” 사무실 안의 공기는 썰렁해졌다.웬 여자가 저리 거세냐는 듯놀란 눈길의 얼굴들….

대학원 공부까지 해서 석사가 되어 선망하던 큰 기업체에 남자와 동등하게시험을 치고 들어가,남자와 똑같은 일을 하는 이 여사원의 하루하루는 기분잡치는 일의 연속이었다.

이아무개라는 성명 석자는 제쳐놓고,상사나 한두 해 먼저 들어온 선배 사원,심지어 함께 입사한 동기 남자들까지 ‘미스 리’하고 부를 때마다 속이 끓었다.저들은 자리에 한가롭게 앉아 있으면서 여자 동료 사원의 커피 ‘서비스’를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꼬웠다.분위기를 위해 좀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면 “미스 리,오늘은 섹시한데” 어쩌구 하는 따위의농지거리를 걸어 오는 것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몇 달 동안 견디다 대학 강사자리가 나오자 미련없이 회사를 떠났다.막상대학 시간 강사를 해 보니,강사료는 교통비로 쓰고 나면 남는 것도 없고,대학사회라고 성차별이 덜하지 않았다.같은 무렵 시작한 남자 강사들은 몇 해지나자 하나 둘 전임 자리를 얻는데,10년이 가깝도록 여자에게는 오라는 데가 없었다.

대학 강사로서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노라니,‘때려 치운’ 옛 직장이 더러 생각나기도 했다.월급 괜찮은 그 곳에서 고분고분 차 심부름이나 잘 하면서 초년을 국으로 죽어지낼 걸 그랬지 후회까지 하는 자신이 처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 또 하나.올해 취업 전선에 나선 ‘미스 리’ 후배도 가장 괜찮다는대학을 괜찮은 성적으로 나왔다.두어 가지 외국어 실력을 자신이 있을 만큼닦았으며,생활과 밀접한 몇 가지 법률을 공부하고 컴퓨터도 익혔다.

국내에서 괜찮은 곳으로 알려진 회사에서 급여가 괜찮은 신입 여자 사무원을 공채한다고 해서 응시했다.영어 필기 시험과 회화 시험이 있었다.국제시대니까 국제적인 업무도 있을 것이고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있겠구나 하고기대감을 품었다.

기대는 면접 때 벌써 깨지고 말았다.면접위원으로 사무원 고참인 듯한 여성이 나왔는데,영어 실력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영어로 볼 업무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면접위원이 이력서를 훑어보고 나서 하는 질문은 더욱 가슴시린 것이었다.“아침에 출근해서 차 몇 잔씩 ‘서브’해야 하는데 그런 일할 수 있어요?” 또 물었다.“은행 심부름도 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요?” 여성 스스로 여성의 설자리를 한정하고 다른 여성한테도 그리 하도록 다짐을 놓는다.급사가 필요하면 급사를 따로 채용해 쓰도록 해서 제 본분을 찾으려고 여성들이 노력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구직 초년생이 말할 수는없었다.

세상 형편이 선배가 첫 취업하던 때하고 또 달라서 남자와 동등하게 겨룰만한 곳에서는 여자를 거의 뽑지 않았다.몇몇 군데 알아본 자리들이란 것이그렇고 그랬다.급여 수준이 신통치 않거나 구실이 고작 ‘고학력 급사’에가까웠다.



대학원 진학을 생각해 보지만 선배의 곤고한 삶이 눈앞에 어른거린다.요즘같은 취업난 시대에 너무고르지 말고 안정된 일자리라면 자존심 눅이고 잡으라는 주위의 충고를 귓곁으로 흘릴 수만은 없다는 것도 안다.

또 한 사람의‘미스 리’가 될 사회 새내기는 제 앞길에 놓인 장벽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1999-03-19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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