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박지에 새긴 사랑/서해성 소설가(굄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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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8-09-08 00:00
입력 1998-09-08 00:00
김남주는 언젠가 말했다. ‘만인을 위해 일할 때 나는 자유’. 이처럼 당당하고 서슬 푸른 직정만이 그의 노래는 아니다. 어느 가을 ‘옛 마을을 지나며’ 쓴 짧은 시는 이렇다. ‘찬 서리/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조선의 마음이여.’ 내친 김에 하나 더 읽어보자. ‘서리가 내리고/산에 들에 하얗게/서리가 내리고/찬서리 내려 산에는/…/당신은 당신을 이름하여/꽃이라했지요/꺾일 듯 꺾이지 않는/산에 피면 산국화/들에 피면 들국화…’ 가수 박치음이 이즈음 가락을 부쳐 노래하는 ‘산국화’는 듣는 이를 사뭇 애조 띠게 한다. 이 여백의 정조와 여유를 김남주의 시에서 새로 읽어낼 일이다.
개혁이란 삿된 과거를 청산하고 내일의 잣대를 바르게 벼르는 일이다. 동시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게끔 서슴없이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내던졌던 사람들의 삶을 반듯하게 복원하고 기록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뜻을 모아 김남주의 문학과 삶을 기려 시비를 세우기로 했다 하니,그 일의 머릿돌이 되었으면 한다. 돌이키건대 어찌 역사와 양심의 돌에 새겨야 할 이름이 그뿐이랴. 그들에게 진 빚을 잊는 그 순간,민주주의의 암전은 시작되리라. 은박지에 새긴 사랑의 맹세를 우리가 저버리는 순간 말이다.
1998-09-08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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