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맡은 내 앞가림(朴康文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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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8-08-28 00:00
입력 1998-08-28 00:00
○힘있는 곳에 부패가
15세기 서양 백성들 눈에, 법률가란 악덕의 표상으로 비쳤다. 법률가들이 양피지에 뭔가를 쓰고 나면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지는데, 까막눈인 보통사람은 뭐가 뭔지 모르고 죽는 일이 많았다. 힘이 있는 곳에 부패가 있기 쉬운 것은 예나 이제나 같다. 법률가들이 민초들이 꼽은 제거 제1순위 표적 집단이 된 것은 그만큼 전횡과 부패가 심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셰익스피어 시대에도 아마 그랬으니까 이 대목을 집어 넣었을 것이다.
성경에 율법학자 또는 율법교사들에 관한 언급이 많은데,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예수의 꾸짖음이 준열하다.
“너희 율법교사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너희 스스로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사람도 막았다”
19세기 프랑스 풍자화가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을 보면, 법률가는 대개 탐욕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얼마 전 새로 대법관 된 분의 청빈이 화제가 됐다. 법관 직분에 있으면서 청빈하기가 어렵다는 통념이 지금 우리 사회에도 깊이 깔려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오늘날 선진국에도 법률가, 특히 변호사에 대한 풍자적 농담이 많은 것은 여전히 그 직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직분이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그 직분의 일탈에 대한 비판은 크다.천국과 지옥 사이에 송사가 났다 하면 지옥이 이기게 마련인데, 법률가들이 지옥에 모두 가 있기 때문이라는 농담이 있다.
이런 농담도 있다. 입원한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의사더러 변호사를 불러 달라고 했다. 의사가 변호사를 불러 함께 병상에 다가갔다. 노인은 두 사람을 본 뒤 다시 누워 눈을 감고 아무 말이 없었다. 몇 분 뒤 의사가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노인이 말했다. “예수는 양쪽에 도둑 두 사람을 두고 죽었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소”
변호사를 헐뜯는 농담이 끊임없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모든 변호사가 다 탐욕스러운 것은 물론 아니다. 물질적 풍요와 안온한 삶을 포기하고, 외롭게 의로운 투쟁을 하는 이들의 편에 서서 핍박을 받아 온 이들도 있다.
○변호사·언론 도마위에
지금 변호사 징계권을 대한변호사협회(변협)가 지니고 있으나,정부에 되돌리는 것으로 규제개혁위원회가 추진하자 변협과 변호사들이 반발하고 있다.내가 해야 할 앞가림을 남이 나서서 해 준다는 것, 자율이 다시 타율로 가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비리 변호사들을 스스로 징계하지 못한 죄로, 오랫동안 어려운 시절을 겪은 뒤 찾게 된 징계권이 5년만에 다시 관으로 넘어갈 판이다.
제 앞가림을 남이 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언론도 도마 위에 올라 있다. 어제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연)라는 시민단체가 결성되었다. 시민단체가 이제는 언론을 그대로 두지 않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해야 할 때 할 말 못한 지난 날이 부끄럽고 앞으로 어떻게 나무람당할지 두렵기만 하다.<편집국 부국장 pensanto@seoul.co.kr>
1998-08-28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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