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받은 판결에 흔들림이 없었을까(박갑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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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8-03-04 00:00
입력 1998-03-04 00:00
성실하지도 주의깊지도 못한 재판으로<부활>의 마슬로바(카튜샤)는 유죄판결을 받는다.“살해할 뜻이 없었다”는 귀절만 빠뜨리지 않았더라면 석방될것인데 개개풀린 눈길들의 ‘큰 실책’으로 엄벙덤벙 넘어가버린 결과였다.

그 재판의 배심원이었던 네프류도프는 회의한다.“…사람에게는 사람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나는 모든재판을 무익하다고 봅니다.아니,부도덕하다고 생각합니다”.네프류도프의 이같은 재판관은 불완전한 인간의 불완전한 상황인식과 판단에 대한 비판이었고 현대사회의 위선에 대한 도전이었다.또 자신의 ‘동물적 자아’가 결과한 한여인의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참회하는 양심의 눈뜨임이었다고도 할것이고.

우리조상들도 바로 그점에서 과연 ‘옳은 단죄(재판)’였나 자성하는 것을 기록들은 보여준다.불행한 현실에 대해서도 혹시 잘못된 징벌과 관계되는 것 아닌가 되돌아보지 않던가.가령 형조참판을 오래하는 매계문근을 보자.어느날 그는 자기가 문초하여 자백받은 죄인들의 경우가 모두 옳았던가 자문하면서 한가지 실험을 한다.

집안사람들에게 닭둥우리속 달걀을 가져간 자는 형벌로 다스리겠다고 드레지게 엄포놓고서 스스로 달걀을 감춘다음 평소 손버릇 나쁜 계집종을 매질로 닦달했다.그러자 계집종은 제가 삶아먹었노라고 ‘자백’한다.문참판의 장탄식­.“내가 장차 후손이 없겠구나.10년동안 형관을 했는데 죄를 자백한자 가운데 계집종 같은 경우가 어찌 없다하겠는가”.(<효빈잡기>)

이렇게 어려운 것이 세상사의 흑백가리기.그래서 어떤사람이 오리 이원익 정승에게 물은일이 있다.“어떻게하면 훌륭한 판결을 내릴수 있습니까”하고.그의 대답.“… 구체적사건을 떠나 미리 좋은 판결방법을 말할수야 있겠는가.그러나 굳이 말한다면 판결할때는 마음을 공평하게 가져야하고 설사 청천벽력이 떨어져도 두려워말고 공적인 처지에서 처리하면 되지않겠는가”(<공사견문록>)

판사들의 돈과 관계되는 추문이 안기는 실망과 충격은 유다르다.‘마지막 양심의 보루’가 무너지는 아픔이 가슴을 치기때문이다.애바르게 돈을 받고서야 이오이가 말했던바 ‘공평한 마음’이나 ‘청천벽력에도 두려워않는 마음’을 어떻게 지닐수 있겠는가.돈과 이권이 내린 ‘부도덕한 판결’로 해서 가슴에 멍이 든 ‘현대의 카튜샤’는 얼마였을꼬.생각할수록 통탄스럽구나.<칼럼니스트>
1998-03-04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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