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이 의원의 자살/강석진 도쿄 특파원(오늘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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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8-02-20 00:00
입력 1998-02-20 00:00
그는 니코증권사에 법으로 금지된 차명계좌를 개설하고 부당이익을 제공하도록 압력을 가해 온 혐의를 받고 있었다.구속영장은 이미 발부됐고 본회의에서 이날중 구속동의안이 처리되면 바로 구속될 예정이었다.
한국에서는 그가 한국계라는 점에서 특히 관심을 끌어 왔다.
그는 중의원 참고인 진술 때 16살 때까지 재일한국인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다.그의 옛성은 박.귀화후 도쿄대 경제학과를 나와 일본에서 제일 어렵다는 고시를 거쳐 대장성에 입성했다.
86년 자민당 공천으로 도쿄에서 출마,당선된 이후 내리 4선을 기록했다.인생의 3분의 2가 넘는 34년을 일본인으로서 산 그였지만 선거 때는 ‘조센징(조선인)’이라는 스티커가 붙는 등 역풍에 시달렸다.
아라이 의원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일까,한국과의 연계를 극력 피해왔다.한국으로부터 이런 저런 접촉 제의가 오면 ‘일본 국헌을 준수하고 일본 국익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 의원이 됐다’는 말도 했다.한국계임을 떳떳이 밝히고 한국과 활발한 접촉을 펴는 미국의 김창준 의원과 아라이 의원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라이 의원도 검찰의 수사망에 걸려 든 이후에는 주위에 ‘한국계라서 당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가 하면 중의원에서는 재일한국인이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입에 올리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그가 ‘평성시대의 료마(용마:명치유신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한 협객)’라고 불릴 정도로 개혁파임을 자임하면서 뒤로는 부정이익을 챙기는 파렴치 행위로 미운 털이 박혔다는 평가도 있다.또 자민당을 탈당해 이 당 저 당 옮기다가 다시 자민당으로 복당하는 등 갈 지자 정치 행보가 발밑을 팠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의 개인적 이력을 보나 검찰의 수사과정을 되돌아 볼 때 특별히 한국계라고 해서 의미를 둘 이유는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한국인’이라는 둥지를 쳐다보면서 죽은 듯하다.애잔한 마음 금할 수 없다.
1998-02-2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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