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힘/김희진 국립국어연 학예연구관(굄돌)
기자
수정 1997-12-27 00:00
입력 1997-12-27 00:00
어떤 사람이 급전이 필요하다고 하도 사정하여 어머님(시어머니)이 제법 큰 돈을 빌려 주신 적이 있다.곧 돌려준다던 사람이 반 년이 넘도록 소식이없자,어머님은 사정이나 알아본다고 그 집을 찾아가셨다.대문을 들어서자 헛간에는 연탄이 가득 쌓여 있고 집도 이층으로 높였으며 못 듣던 피아노 소리까지 흘러나왔다.현관 앞에서 만난 그 집 주인은 형편이 어려워 줄 돈이 없다고 했다.어머님은 두말없이 이내 몸을 돌리셨다.
“한번 따지지 그러셨어요.”난 어머님이 그대로 돌아오신 걸 이해할 수 없었다.그쪽 살림이 궁하다면야 모를까 집안에 윤기가 돈다면 빚을 갚도록 요구해야 하는것이 아닌가.시동생들 등록금만 해도 얼만데…….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내 표정을 읽으신 듯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얘야,따지자면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지?그러면 그 사람 역시 속이 언짢으니 무슨 말인들 못 하겠니?험한 말을 들으며 어찌 사느냐,자식 기르는 사람이…….”
어머님은 살림이 심히 쪼들릴 때에도 그 집을 다시 찾지 않으셨다.나는 어머님이 떼이신 돈을 쌀 몇 가마,등록금 몇 회분으로 계산해 가며 아쉬워했다.그러나 남이 무심코 던지는 험악한 말로 자식이 혹 잘못 될까 두려워,하고 싶으신 말도 꽁꽁 숨겨 놓고 사시는 어머님을 보며,이것 저것 헤아리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깨달았다.시동생들이 자기 몫을 다하며 사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듯싶다.
1997-12-27 18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