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 왜 유서에서 의원 등에 미안해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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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7-04-29 00:00
입력 1997-04-29 00:00
◎검찰진술­청문회때 거명 사과할듯

자살한 박석태 전 제일은행 상무는 『제일은행이 한보철강에 특혜를 주었다』고 주장한 야당 정치인 등에 대한 로비의 주역이었다.유서에서 거명한 국민회의 김원길 의원과 박태영 전의원이 그들이다.

박 전 상무가 지난 2월 검찰에서 쓴 자술서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그는 국정감사를 앞두고 김종국 전 한보 재정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국민회의 김원길 의원 등 야당 의원 4명이 제일은행의 한보 대출 관련 자료를 요구하고 있으니 무마해달라고 부탁했다.

박 전 상무는 95년 10월에도 신한국당 정재철 의원을 만나 『국민회의 박태영 의원이 금융계에서 가장 골치 아픈 인물』이라며 질의를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정의원이 이를 받아 적었으며 그후 정의원이 국민회의 권노갑 의원에게 그같은 뜻을 전한 것으로 안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

박 전 상무는 지난 17일 열린 국회 청문회에서도 유원건설의 인수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이철수 당시 행장의 지시로 95년 6월 청와대로 윤진식 경제비서관을 찾아가 한보그룹이 내정된 사실을 보고했다고 증언했다.그는 외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한보가 갑자기 유원 건설을 인수,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그는 청문회 증언이 끝난뒤 한보 사태와 관련해 자신이 실명으로 거론한 정치인과 이철수·신광식 전 제일은행장 등에게 누를 끼쳤다며 자책한 것으로 알려졌다.<김상연 기자>

◎청문회 태도 어떠했나/비교적 솔직하게 답변/모욕적 인식공격 질의도 받아

28일 자살한 박석태 전 제일은행상무는 지난 17일 한보철강 주거래은행의 실무책임자로 한보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해 비교적 솔직하게 특위위원들의 질의에 답했다.

박씨는 당시 하오2시부터 8시까지 6시간가량 신문을 받았으며,특히 지난 95년 한보철강의 유원건설 및 우성건설 인수때 이철수전행장의 지시로 청와대 윤진식 경제담당비서관에게 관련사실을 보고하는등 「한보사태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의혹때문에 의원들의 집중적인 질문이 쏟아졌다.

그는 또 야당의원들의 국정감사 자료요청 무마를 위한 막후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도 알려져 여야의원들에게 샌드위치 질문세례를 받는 등 청문회 내내 무척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실직에 따른 충격으로 몸이 상당히 쇠약해 보였으며,눈상태가 좋지 않아 시종 고통스런 표정을 짓기도 해 특위위원들로부터 건강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했다.

박씨는 막대한 대출 배경에 대한 추궁에 『1백억원이 넘는 여신은 은행장의 결심이 서야 결정된다』고 증언했다가,상관에게 책임을 떠넘긴다는 질책을 받기도 했다.

신문 도중 『한보대출과 관련해 수천만원의 뇌물을 받지 않았느냐』(국민회의 조순형 의원),『증인의 딸이 검사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버지와 검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국민회의 김경재 의원)는 등의 모욕적인 인신공격을 받아야 했다.<한종태 기자>

◎박씨는 누구인가/대출 심사전문가/한보 유원건설인수 간여

박석태 전 제일은행상무(58)는 여신(대출) 및 심사전문가다.특히 한보철강에 대한 대출과 관련이 깊고 한보그룹이 유원건설(현 한보건설)을 인수할 때 담당 임원이다.

조용하고 꼼꼼한 성격에다 책임감이 강한 인물로 제일은행 직원들은 기억하고 있다.그는 최근 한보철강 사태때문에 무척 괴로와했다고 한다.

제일은행이 한보철강이 부도나기 전에 대출해준 금액은 1조7백94억원.이중 1조5천47억원이 박 전 상무가 담당임원이 된(94년 2월)이후 대출됐다.또 93년 5월 광주지점장에서 본점 심사1부장으로 옮긴 이래 그가 한보관련 업무를 도맡다시피 했기 때문에 여신전체에 관련돼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38년생으로 목포 무안출신.함평의 학다리고를 나와 61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했다.66년 제일은행에 입행해 광주지점장,심사 1부장를 지냈으며 94년 임원이 됐다.한보철강에 대한 대출책임과 관련해 은행감독원으로부터 문책경고를 받아 지난 3월의 주총에서 유임되지 못하고 물러난 뒤 외부접촉을 자제한채 생활해왔다.

80년대 초에는 망원동집에 수해가 들어 북한의 쌀을 받았을 정도로 망원동에 오래 살았다.부인 김주영 여사(52)와의 사이에 1남4녀.둘째딸은 사법연수원에서 연수중이다.<곽태헌 기자>
1997-04-29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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