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생과 사/박정란 방송작가(굄돌)
기자
수정 1997-04-28 00:00
입력 1997-04-28 00:00
드라마는 그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다.한번은 내가 쓴 드라마에서 「걸 기대,개봉박두」라는 대사를 썼다.그랬더니 서울대학을 나온 젊은 PD가 이 말이 무슨 말이냐는 것이었다.나는 농담인줄 알았는데 정말 모른다는 것이다.너무 어이가 없어 그 옆에 있는 AD에게 「걸 기대,개봉박두」를 정말 모르냐고 물었다.그렇다는 것이다.내가 젊었을 때,우리는 매일 신문 영화광고에 주먹만한 글자로 「걸 기대,개봉박두」라고 씌어있는 것을 가슴 설레며 보곤 했었다.그리고 여기저기 그 말을 이용해 쓸 때가 많았다.그런데 X세대라면 모르지만 30대 후반이 그걸 모른다는데 적잖이 충격이 왔다.
지면이 모자라 다 열거할 수가 없지만 시대에 따라 얼마나 많은 말들이 명멸하는지 모른다.
나는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러다 정직이나 진실이라는 말이 멀지않아 죽은 말이 되면 어쩌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아무도 정직하지도 않고 정직할 필요도 없는 시대라면 정직이나 진실이라는 말이 「걸 기대 개봉박두」처럼 사라져 죽은 말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나.
우리 아이들이 걱정이다.부자에 대해서도 정치가에 대해서도 권력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고 아무도 신뢰할 수 없는 사회라는 인식을 갖게 될 것이 무섭다.더 무서운 것은,세상을 살아가려면 정직하면 손해라는 것을 배울까봐 걱정이다.
1997-04-28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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