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96년… 「은혜」를 생각하자(박갑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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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6-12-28 00:00
입력 1996-12-28 00:00
이런걸 『용의 머리에 뱀의 꼬리』(용두사미)라 했다.이말은 「벽암집」의 진존자 얘기에서 나왔다.그는 깊은 경지에 이른 고승이었다.어느날 한스님을 만나 말을 주고받는데 상대가 갑자기 『에잇!』하고 소리친다.네뚜리로 여기는구나 싶어 움츠렸다가 고개를 드니 또 『에잇!』.진존자 눈에는 그가 제법 도를 깨친듯하고는 있지만 용의 머리에 뱀의 꼬리일 것 같은 앙달머리로 비쳤다.그래서 땀직하게 나무란다.『그대는 에잇에잇 하면서 위세는 좋지만 그다음엔 무엇으로 마무리지으려는고』
상대방은 자기 엄펑소니 속셈이 드러난걸 알고서 뱀의 꼬리를 내보이고 말았다는 것이다.알맹이가 따르지 못하는 시작은 위세가 좋다해도 마침내 되양되양해 뵐뿐이다.그러느니 차라리 뱀의머리로 시작했다 뱀의 머리로 마무리짓는 한결같음이 얼마나 더 바람직스러운가.
『세상사람들이 일을 해나가면서 거의 이루어내다가 실패하거니와 나중 삼가기를 처음과같이 한다면(신종여시) 실패가 없을 것이다』.「노자」(64장)에 나오는 이 「신종여시」는 「서경」(태갑하편)에도 보인다.용두사미됨을 경계하는 가르침이다.새해의 의욕찬 계획을 탓함이 아니다.그자세를 끝까지 이어나가라는 뜻.그러나 사람들은 한해를 보내면서 새해아침 생각을 뒷갈망 못했다는 회한에 젖으며 살아온다.
설사 이것저것 아쉬움이 남는다 하더라도 베풂받은 은혜에 대한 고마움만은 느끼면서 이해를 넘겼으면 한다.「한비자」(열림하편)의 말을 떠올린다.『…주주라는 새는 머리가 무겁고 꽁지는 굽어있어 강물을 마시려면 고꾸라진다.그래서 다른 새가 그 날개를 물어주고 있어야만 물을 마실수 있다』.그것이다. 『굴껍질 하나만 먹어도 동정호 잊지 않는다』지 않았던가.주주는 날개 물어준 새의 은혜를 잊지않아야한다.하물며 사람이겠는가.
이해에 가버린 어른 친지들을 떠올리며 서산마루를 지켜본다.누구나 가는 길이어니….고개숙인다.〈칼럼니스트〉
1996-12-28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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