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작소설/퇴폐·암울… 「세기말 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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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6-09-19 00:00
입력 1996-09-19 00:00
무료한 삶을 끝내주는 자살청부업자가 달콤씁쓰레한 속삭임으로 유혹한다.인질이 인질범과 사랑에 빠져 자동차 도주끝에 사고사한다….
요즘 소설의 줄거리들이다.80년대 사실주의와 90년대 초반 후일담·사소설 등이 주도하던 소설에 세기말의 퇴폐적이고 암울한 분위기가 뚜렷하다.세기말 징후는 젊은 작가들의 전작장편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번져가고 있다.
지난해 국민일보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노래하라,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고물장수로 떠도는 사내를 내세워 버려진 삶들을 처절하고도 투박하게 형상화했다.작가인 문윤근씨는 곧 출간될 두번째 장편 「천국의 셋방」(가제·문학과지성사)에서 지식인의 피폐한 모습,현대적 사랑의 불모성 등을 되풀이변주할 예정.올해 작가세계 문학상을 탄 「오렌지」에서 20세안팎 신세대들의 뿌리뽑힌 삶을 감각적으로 보여준 정정희씨는 최근 나온 「토마토」(세계사)에선 30세를 목전에 둔 주인공들까지 싸잡아 방황시키고 있다.지난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백민석씨의 「헤이,우리 소풍 간다」는 80년대 사회문제를 구조적 접근으로 해결하려 했던 선배들 작품과 달리 그 외상으로 파멸해가는 주인공들의 끔찍스런 모습을 부각시킨다.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작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 이르면 이같은 흐름은 대단한 세련미마저 갖추게 된다.
평자들은 세기말의 작가들이 대체로 「전망없는」「이야기꾼」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고 말한다.전망이 없다는 것은 이들이 예전처럼 소설을 통해 사회문제의 해답을 모색하거나 메시지를 던지는데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그보다는 허무한 시대의 타락과 방황을 누가 더 감각적이고 개성적으로 형상화하느냐 하는데 몰두한다.한편 「이야기꾼」이라 함은 사실성의 강박에서 풀려나 보다 자유롭게 개성적인 이야기를 꾸며내게 된 흐름을 일컫는다.김영하의 작품은 결코 있을 법하지 않은 자살청부업자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팬터지 소설」이란 칭호를 얻었다.
전통적 문법의 문학에 익은 문인들은 유행처럼 번진 이같은 소설들을 결코 편치못한 눈으로 바라본다.우선 허무와 존재의 공허를 표현한다며 작품을 무작정 자극적으로 몰아가는 것이 못마땅하다.걸핏하면 휙 떠나고 너무도 고민없이 자살하며 찰나적인 사랑과 섹스,폭력이 난무한다는 비난이다.
또한 문학 고유의 소중한 가치로 여겨져온 존재와 역사에 대한 통찰을 아무 반성없이 내던질 수 있느냐는 비판도 따른다.문학평론가 이동하씨(서울시립대 교수)는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사람사는 사회의 근본문제는 그리 변하지 않는다.세기말의 추상적 분위기에 들뜨기보다 구체적 삶의 문제에 귀기울여야 하는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목소리도 들린다.젊은 문학평론가 장은수씨는 『소설이 타인의 인생이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던 시대는 지났다.메시지보다 이야기를 전하는 소설은 싫든좋든 미래의대세』라면서 『새로운 흐름을 들고나온 세대의 문화적 감수성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사고해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의견을 들려줬다.문학동네 출판사의 강태형사장은 『아직은 오류와 미숙함이 많을 지라도 세기말 소설은 다매체 시대에 소설이 살아남을 한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흔히들 말하는 계몽적 메시지와는 다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21세기에 대한 통찰까지 보여줄 작품을 기다린다』고 말했다.<손정숙 기자>
1996-09-19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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