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제주군 대정읍 돌하루방(한국인의 얼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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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6-05-17 00:00
입력 1996-05-17 00:00
오늘날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인성·안성·보성리는 조선시대 대정현청이 있던 고을 자리다.여기 와서 『돌하루방이 어디 있느냐?』고 토박이들에게 물었다면 『작간대 이수다』라는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곁에 있다」는 제주도 사투리다.대정현 당시 쌓은 읍성의 성돌도 현무암이요,그 성벽 지척에 돌하루방 역시 회흑색 돌인지라 하루방이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대정의 돌하루방은 대정읍성 동문과 서문, 남문에 각각 1기씩 성문 밖에 3기가 우선 몰려있다. 그리고 보성초등학교에 3기,추사관과 마을회관앞에 각각 2기,토끼동산에 1기가 자리잡았다.대정의 돌하루방은 유별나게 키가 작았다. 평균 키가 1백36㎝에 지나지 않아 제주시 돌하루방 키와는 비교가 안되고,표선읍 성읍리 돌하루방 보다도 더 작은 키를 했다. 머쓱하지 않고 올차보이는 이유가 작은 키에 들어있다.
대정의 돌하루방은 거의가 둥글넓적하고 펑퍼짐한 벙거지를 썼다. 머리통크기가 키의 절반쯤은 차지했는데,얼굴에서는 후덕한 인상이 우러났다.그 까닭은 볼에 살이 실하게 붙어서일 것이다.대정 돌하루방의 또 다른 특징은 눈이다. 석수장이 타지역과 차별화를 시도했는지는 모르나 대정 돌하루방 눈에는 동자를 새겨넣었다. 이들 대정 돌하루방은 눈동자가 분명했으니까 읍성을 지키는데 어설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정 돌하루방의 코는 제주시의 돌하루방과 사뭇 다르고 코만을 비교한다면 표선면 성읍리 돌하루방을 좀 닮았다.그래서 제주시 돌하루방의 주먹코와는 달리 콧마루가 비교적 오뚝하고 길다.입은 작게 오목새김 했다.더러는 작은 입을 다물었고 또 어떤 돌하루방은 약간 느슨하게 입을 열었다. 흔히들 말하기를 인간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한 것이 대정의 돌하루방이라는 것이다.겨울 해풍이 매서워 목도리를 두른 돌하루방이 몇몇 있고 보면 사람이 하는 짓도 따라 하는 모양이다.
그러면 제주도의 돌하루방은 뭍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섬에서 스스로 태어난 것일까,아니면 어디서 흘러들어온 것일까.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없으나추정은 두 갈래로 나와 있다.남태평양의 석상문화와 몽골족.돌궐풍의 북방문화 유입설이다.
남태평양설은 제주도가 지리적으로 해양문화권일 수 있다는 점이고 북방설은 몽골이 제주도를 오랫동안 지배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 고유의 향토적 특색을 고려하지 않고는 돌하루방 신원을 들춰낼 수 없다.분노하는 바다와 싸우고 거친 땅을 일구면서 자연의 섭리를 터득한 제주도 사람들의 자화상이 돌하루방인 것이다. 어깨가 넓어 보이고 더러 가슴이 튀어나온 돌하루방을 대하노라면 한 꺼풀을 훌쩍 벗어던졌다.그리고 숨겨둔 강인성을 드러내 보였다.
이들 돌하루방과 더불어 대정땅을 지킨 읍성은 제주도기념물 12호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있다. 그리고 대정은 추사 김정희가 9년동안 유배된 적거의 땅이거니와 그의 유명한 문인화 「세한도」의 산실이기도 하다.<황규호 기자>
1996-05-17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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