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의 수첩(영화탄생 100년/감동의 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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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5-10-07 00:00
입력 1995-10-07 00:00
알프스의 연봉이 멀리 보이는 안개 자욱한 늦가을의 코모호반.장대한 저택에서 무료하게 사는 아름다운 중년 미망인 크리스틴(마리 벨)의 회상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도 없이 덧없는 인생의 슬픔에 젖은 그녀는 20년전의 낡은 수첩을 더듬으며 청춘의 환영을 쫓아 여행길을 떠난다.
주마등같이 흘러간 지난날의 추억은 감미롭다.나이 16세때 무도회에서 만나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첫 남자는 그녀를 연모한 끝에 자살하고 그의 어머니(프랑소와 로제)는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되었다.무도회때 수첩에서 찾아낸 여섯 남자를 찾아가는 에피소드로 옴니버스 형식의 회상스토리가 전개된다.
두번째 남자는 지난날 폴 베를렌의 시를 곧잘 암송하던 다감한 법학도였으나 이제는 속물이 되어 카바레의 지배인으로 전락하고,마침 찾아간 그날 경관에게 체포되는 야릇한 판국이었다.피아니스트였던 이랑(아리보르)은 이제는 신부가 되어 지난날 그녀에게 실연끝에 죽음마저 생각했었다고 담담하게 고해한다.네번째 남자 프랑소와(레이뮤)는 시골마을의 촌장이 되어 있었고,다섯번째 남자 티이예리(피엘브랑샬)는 공장의 무면허 의사로 형편없는 여자와 동거중이었다.미용사인 여섯번째 남자는 네 아이를 가진 평범한 가장으로 그래도 일상적인 행복을 누리고 있는 소시민.집에 돌아온 크리스틴은 호반 건너편에 살고 있는 마지막 남자를 찾아갔으나 일주일전에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그와 꼭 닮은 유아만 만난다.그녀는 그 아이를 양자로 데려오기로 결심한다.
내가 이 영화를 본 것은 광복후 프랑스영화가 막 들어오던 시절이었다.이 작품에는 프랑스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릴리시즘과 로맨티시즘이 결합하여 전원적인 묘사가 돋보였다.
마리 벨,프랑소와 로제,루이 쥬베 등 기라성같은 당대 명우들의 정교한 연기도 빼어났다.아직 인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나이였으나 전편에 흐르는 페시미즘과 허무의 미학에 흠뻑 빨려들었다.
1930년대 르노와르,르네 끌레르 등과 더불어 프랑스 영화를 대표하던 거장 줄리앙 뒤비비예가 1938년에 만든 고전명화의 하나다.그는 이보다 먼저 또하나의 명작 「망향」으로 장가방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바 있다.
암울한 일제말기를 뼈아프게 겪으며 허무주의적인 생각에 기울었던 세대였기에 인생무상의 운명적인 주인공들에게 더욱 공감했던 것도 같다.나의 시네마천국의 앨범속에서 아련히 떠오르는 인상깊은 영화였다.<호현찬 영화진흥공사 사장>
1995-10-07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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