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과 인생/이준호 대신증권 사장(굄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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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5-08-14 00:00
입력 1995-08-14 00:00
여지없이 막히던 도로가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보면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이 시작된 모양이다.젊은이들은 열정과 낭만을 찾아 바다로 떠나고,올망졸망한 자녀를 둔 중년의 부부들은 편안한 휴식을 찾아 계곡으로 발길들을 옮겼으리라.

몇해 전 이던가.충주호 근처에 있는 산으로 피서를 떠난 적이 있었다.풀벌레소리를 벗삼아 산책도 즐기고,산들바람으로 책장은 저절로 넘어가게 놔두고는 세상에 그렇게 달콤할 수 없을 오수를 만끽했던 그런 휴가였다.

느긋한 휴가를 보내던 3일째였던가.그렇게 푸르를 수 없는 하늘아래 하얀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듬직하게 서 있는 앞산이 만만하게 보였다.『그래 오늘은 산신령과 인생을 이야기해 보는 날이다』

조그마한 암자를 끼고 돌아 오솔길을 걸을 때만 해도 정상 정복은 산림에서 뿌려져 나오는 공기만큼이나 상쾌한 일이었다.그렇게 20여분을 걸었을까.갑자기 흰바위가 가파르게 박혀있는 험한 등산로가 나타났다.그만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체면도 체면이려니와 한번 해보자는 욕망이 솟았다.

그렇게 해서시작된 암릉산행은 만만치 않은 두려운 산행이었다.3시간여 오르내리는 동안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던 고독이나 때로 나타나는 깎아지른 듯한 바윗길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내가 가는 길이 정상으로 가는 길인지,또 정상은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이 나를 두렵게 하는 주된 요인이었다.



어쩌면 사전 계획이나 지도 한장 없이 즉흥적으로 시작된 산행에서 상쾌한 정복의 기쁨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어렵사리 오른 정상에서 정상정복의 뿌듯함도 느껴보지 못하고 내려오는 등뒤에서 『인생은 무작정 계획도 없이 사는 것이 아니니라』 하얀 옷을 입은 산신령이 말하는 것 같았다.
1995-08-14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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