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비」에 몰린 인파/나윤도 워싱턴특파원(오늘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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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5-07-14 00:00
입력 1995-07-14 00:00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20년만에 미국과 베트남과의 관계정상화가 발표된 다음날인 12일,워싱턴 한복판에 위치한 베트남 참전비에는 보통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이날따라 조화도 더 많이 놓여있고 쪽지편지도 더 많아 보였다.

지난 82년에 완성된 이 참전비는 높지막하게 위치한 보통 참전비와는 달리 반 지하로 내려가,반들거리는 검은 화강암을 사람 키높이에 중심각이 넓은 V자형으로 길게 세워 놓았으며 그 벽에 음각된 5만8천여명의 전사자 명단을 손으로 직접 만질수 있게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보통때는 관광객들로 붐비지만 이날은 달랐다.전날 대통령의 국교재개 선언을 지켜본 참전용사들과 가족들이 약속한 것도 아니면서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전우의 이름을 만지던 60대의 참전용사는 대통령의 발표를 『시대의 흐름에 따른 어쩔수 없는 조치』로 받아들였다.그러나 40대의 참전용사는 『어리석은 짓』으로 몰아붙였다.이름위에 흰종이를 대고 연필로 마구 그어대 자식의 이름을 하얗게 베껴낸 70대 할머니는 『올때마다 베껴낸이름을 모아 앨범을 만들고 있다』며 선언 따위에는 무관심을 표시했다.

그래도 만지거나 베껴낼 이름이라도 있는 이들은 『실종자(MIA)와 포로(POW)를 먼저 찾아내라』고 검은 매직으로 쓴 판을 목에 걸고 참전비 주위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실종자가족보다는 훨씬 다행스러워 보였다.『실종자와 가족들에 대한 블랙화요일의 대학살』이라고 쓴 판도 눈에 띄었다.

베트남 전선으로 파병됐다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 미군의 수는 2천2백2명.미국정부는 매년 1억달러의 예산을 들여 베트남당국의 협조아래 수십차례 수색작업을 벌여왔지만 이렇다할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과의 국교재개는 바로 이들 실종자들을 찾는데 본격적인 베트남의 협조를 얻기 위한 것이 가장 첫째의 이유이며 경제적 이익이나 안보적 이익은 부수적인 것이라고 클린턴 대통령은 강조했다.

그러나 베트남 참전비 주위를 맴돌며 20년을 한결같이 기다려온 실종자 가족들에게는 대통령의 강조도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갑자기 누군가가 『젊은 병사들의 생명을 담보로 동남아시장에 접근하려 하느냐?』는 글귀가 쓰여진 판을 눈앞에 들이댔다.
1995-07-14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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