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축 다녀온 고 신부의 우울증/이기동 모스크바특파원(오늘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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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5-05-09 00:00
입력 1995-05-09 00:00
그러나 이 계획은 북한당국의 너무도 기막힌 방해로 결국 물거품이 됐다.미사는 4월23일로 예정돼 있었는데 북한당국은 막상 미사를 올릴 날이 되자 갖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처음에는 미사를 일반신도들이 올릴테니 고신부는 옆에서 자리만 지키라고 했다.가톨릭에서 미사 집전은 신부의 고유권한인데 일반신도들이 그 일을 한다니 보통일이 아니었다.고신부가 반대하자 북측은 자기들과 반반씩 미사를 나누어 진행하자는 등 교회법상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조건들을 계속 내걸었다.성당도,신도도 모두 진짜가 아니라는 말인가.
장충성당 미사는 이렇게 해서 무산됐고 이후에도고신부는 몇차례나 더 북한신도들 앞에서 미사를 집전케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북한측은 그때마다 갖은 핑계로 훼방을 놓았다고 한다.결국 미사는 한차례도 드리지 못했고 그는 북한당국으로부터 『왜 우리더러 가짜 신자라고 하느냐』는 등 온갖 험한 소리를 다 들었다고 한다.
이 일이 아니라도 그는 경제적으로 너무도 힘들게 살아가는 북한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그런데도 만나는 주민들마다 『대대로 수령복이 많아 행복하다』는 말을 축음기처럼 되풀이했고 어떤 이는 가슴에 단 김일성 배지를 만져보려고 하자 『왜 수령님께 삿대질이냐』며 펄쩍 뛰더라는 것이었다.그는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발길을 돌리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이 땅을 다시올 수 있을까』고 몇번이나 되뇌었다.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지금 『우리가 북한주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밖에 없는 것같다』며 참담해하고 있다.
1995-05-09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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