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공산당 막바지 투쟁(새로 쓰는 한국현대사: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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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5-05-07 00:00
입력 1995-05-07 00:00
◎「국대안반대투쟁」선동… 미군정 곤경에/UN임시위 입국에 다급… 「2·7폭동」결행/경찰서 공격·수송기관 파업… 빨치산운동 계기로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조사부 〃)

해방공간에서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그 얼굴을 달리했다.이는 공산주의 운동의 강력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투쟁은 극렬쪽으로 치달았다.

1947년의 공산당 투쟁은 남로당이 전해 가을에 주도한 국대안반대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3·22총파업과 7·27투쟁으로 이어졌다.이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박헌영이 이끄는 남한 공산주의자들이 몰락이냐 재기냐의 기로에서서 선택한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다시 말하면 전해의 투쟁전략,신전술에 따른 9월파업과 10월 폭동에서 잃어버린 입지를 생존차원에서 만회하려는 궁여지책이었던 것이다.어떻든 그 결과는 남로당,즉 남한 공산당의 붕괴를 자초했다.

○전국적 동맹휴학 지시

우리는 여기서 47년부터 유혈 폭력화되기 시작한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일련의 조직적 투쟁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그 하나가 미군정 법령 102호로 발효된 「국립서울대학교 창설에 관한 법령」이 도화선을 이룬 국대안반대투쟁이다.이 사건은 조선공산당의 조종을 받은 학원내 세포들이 전국적인 동맹휴학을 선동한 46년 9월에 일어났다.미군정이 국립 서울대학교을 창설하면서 미군정법령 102호를 통해 직접적인 학원 간섭의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서울대 상대 공대 사범대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간 것이 시발이 되었다.이어 9월5일 서울대 이공학부 교직원 38명이 총사직을 결의했고 1947년으로 접어들면서 반대투쟁을 본격화함으로써 군정을 곤경에 빠뜨렸다.

이 국대안은 일부 여론에서도 반대입장을 밝혔지만 이처럼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된 것은 조선공산당의 역할이 컸다.그리고 그 배후에는 소련이 버티고 있었다.당시 북한에 주둔했던 소련군 사령부 교육담당관 니콜라이 그즈노프 소좌가 남로당 위원장에게 내린 지령이 바로 그 사실을 입증한다.그 내용은 『소련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남조선 인민들은 남로당의 계획밑에서 광범한 혁명을 일으킬 임무가 있다.남조선에 있는 모든 학교에서는 광범위하고도 조직적이며 맹렬한 투쟁을 일으키는데 있어 제 1차로 동맹휴학을 합법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76명 피검… 지방당 타격

「국립서울대학교 창설에 관한 법령」발표는 1차 미·소 공위 결렬후 미군정의 정책에 정면 반대하는 소위 신전술을 폈던 조선공산당에게 호기로 작용했다.그래서 좌익학생단체인 민주학생연맹(민학련)과 학원내 당 세포를 통해 국대안 반대투쟁을 대대적으로 벌일 것을 지시했던 것이다.

1947년에 접어들면서 미·소 공위재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남로당은 공위에서 소련의 입장을 우위에 두기 위해 당세확장에 나서는 한편 정치투쟁을 보다 강화했다.미군정도 이에맞서 2월 한달동안 좌익계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자 남로당은 3월10일 전평과 지방당을 조직적으로 가동시켰다.이것이 바로 3월 22일 서울 부산 광주 인천 부평 대구 등 주요도시와 공업지대에서 24시간 파업에 들어간 3·22총파업이다.

남로당은파업을 통해 노동자 권리보장과 박헌영 체포령 취소,구속 전평간부 즉시 석방,좌익신문 정간 취소 등을 구호로 내걸었다.이 파업으로 2백 76명이 피검되는 등 남로당은 지방당 조직이 큰 피해를 입었다.설상가상으로 우익으로부터도 종전보다 더 심한 공격을 받는다.남로당으로서는 이 3·22파업의 후유증 청산이 절실했다.그래서 남로당은 후유증 청산과 5월21일 재개된 미소공위에서 유리한 입지확보를 노려 당원 5배가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러나 공위가 다시 교착상태에 빠지자 공위의 성공을 확신했던 남로당은 당황한 나머지 공위 진전을 위한 군중동원을 기도하기에 이른다.이는 7월27일 전국에서 열린 「미소공위경축 임시정부 수립촉진 인민대회」로 나타났다.전국적으로 열린 인민대회에서는 모두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결정서를 채택했는데 미소공위에 직접 전달되었다.이 결정서는 반탁진영 때문에 공위가 난관에 봉착했다는 것과 실력으로 우익 테러를 분쇄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또 미소공위 협의 대상에서 민전이 가장 적합한 단체라고 강조한 결의서는 임시정부 수립에서 반탁진영을 제외시킬 것과 국호는 인민공화국으로 해야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당시 소련대표 스티코프는 이에 보조를 맞춰 8월 1일 덕수궁 석조전 회의실에서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가졌다.그는 이 회견에서 『공위의 급속추진을 고대하고 있는 조선인민들의 간절한 요청을 달성하기 위해 공위 본회의에서 반탁투쟁위원회에 가입한 소수정당 및 단체문제로 업무의 지연을 일으킬수 없으므로 1백47개 정당,단체에 대한 개별 조사를 시작할 것을 제의했다』고 밝혔다.이 개별조사 대상 정당 및 단체문제는 미소공위 결렬의 주요인으로 작용했다.남로당의 7·27투쟁은 일사분란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공산당은 아무런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남로당의 몸부림 무위로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한국문제가 유엔에 이관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1948년 1월8일 서울에 들어오면서 남로당은 다급해졌다.남한만의 단독선거는 곧 남로당 거점 상실을 의미한 상황에서 극렬 저지투쟁은 최선책일 수 밖에 없었다.2월7일 민전과 전평을 내세워 전국에 걸쳐 조직적인 폭동 파업을 결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미국 버클리대 교수를 역임한 R A 스칼라피노는 자신의 저서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이렇게 전한다.『엄청난 폭력을 수반한 파업이 일어나자 수송기관들은 태업에 들어갔고 숱한 경찰서가 공격을 받았다.정부관리들이나 보수파의 지도자 가운데 5명이 죽고 13명이 부상,납치됐다.파업 참가자 가운데 28명이 죽고 10명이 부상당했으며 1천4백89명이 체포됐다』.

미군정의 마지막해 1948년의 2·7폭동은 남로당이 무장투쟁 전술을 도입한 계기가 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7폭동은 각 지방에 「야산대」라는 무장게릴라 조직(빨치산)을 만들어낸 계기가 됐던 것이다.거의 전쟁이나 다름없었던 제주도 4·3사태도 그 흐름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평가될 수 있다.그러나 남로당의 저지투쟁은 무위로 끝났고 마침내 제주도르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5·10선거가 치러졌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 CIC문서 발굴/“하지가 박헌영에 도망칠 시간 주었다”/“체포땐 미소공위 재개에 걸림돌”판단/46년 10월 월북… 남로당 「10월 폭동」지령

해방정국에서 남한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한 박헌영은 미군정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한 존재였다.그래서 체포령을 내렸지만 실제 붙잡지 않고 쫓아버렸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국립공문서 보존관리국(NARA)에서 찾은 주한미군사령부 방첩대(CIC)문서를 통해 밝혀냈다.

이 문서는 1946년 11월 12일 한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 13차회의에서 보고된 「박헌영의 구속영장에 관한 장택상의 진술」.의장(김규식을 지칭)이 박헌영을 체포하는데 경찰이 실패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답변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장택상은 여기서 박의 체포명령은 결코 못 받았다고 전제하면서 얼마후 CIC의 니스트 대령으로부터 찾아보라는 말은 들었다고 답변하고 있다.

그러나 하지 장군으로부터 니스트 대령의 하는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 장택상은 하지 장군이 박에게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일부러 벌어 준 것으로 보았다.따라서 박이 체포령을 피해 도망갔는데 이 대목은 하지장군과 러치 장군,맥그린 대령 등이 증명할 수 있다고 장택상은 덧붙였다.

미군정 최고책임자 하지가 박헌영 체포를 지연시킨 까닭은 아마도 소련을 의식한 배려로 풀이될 수 있다.박헌영의 체포는 자칫 미소공위 재개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과 함께 박이 숨어버린다면 공산당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떻든 박헌영은 그해 10월초 체포령을 피해 북으로 넘어갔다.그동안의 증언을 종합하면 박은 38선이 가까운 해주에서 남한공산당을 조종한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나 소위 국대안반대투쟁과 10월 폭동을 해주에서 지령함으로써 하지가 노린 공산당 무력화 노력은 실패했던 것이다.
1995-05-07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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