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바사항/“흑인노예 수출항”… 슬픈역사 간직(아프리카 기행: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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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5-04-23 00:00
입력 1995-04-23 00:00
케냐 동쪽 끝에 위치한 몸바사는 탐욕스런 무역상인들에 의해서 아프리카 흑인들의 노예수출 중심 항구로 비정의 역사를 갖고 있다.오늘날에도 동아프리카의 중요한 무역항이다.처음에는 인도양 위에 떠있는 조용한 산호섬이었으나 지금은 섬이었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몸바사로 가는 가장 훌륭한 여행길은 나이로비에서 기차를 타고 대평원을 가로질러 몸바사항에 닿는 노정이다.덴마크 공주 카렌이 그의 연인이 되었던 영국인 수렵가 해턴과의 운명적인 첫 해우를 한것도 바로 몸바사를 떠나 나이로비로 향하던 기차여행중에서였다.이 기차를 타면 아프리카 대평원에 뜨고 지는 태양과 아프리카서민들의 생활과 정한을 눈여겨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는다.그러나 여행일정에 쫓겼고 열차의 발차시각이 한 밤이라서 비행기를 이용하게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케냐 서쪽에 있는 우간다와 르완다는 유럽의 스위스처럼 바다가 없는 나라다.그렇기 때문에 몸바사에서 내륙으로 놓여진 철도가 없었다면 이들 나라는 현대문명사회와 고립되었을 것이다.몸바사에서 이어지는 철도와 도로망은 그들에게 있어 라인강과 같은 젖줄인 셈이다.오만의 몸바사에서 따온 지명인데 케냐의 몸바사는 11세기때 아랍상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인도양 횡단교역에 절대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노예시장” 흥청
1498년 포르투갈의 탐험가인 바스코 다가마는 상거래의 중요한 항구로서 몸바사를 점찍었고 그로인해 이곳에는 노예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유럽의 백인들이 아프리카 니그로들을 사냥하듯 잡아 바깥 세계에 노예로 수출한 악명 높은 항구가 바로 몸바사다.1840년 잔지바르(몸바사 아래쪽의 섬)의 성주가 통치권을 행사할 때까지 아랍과 페르시아,포르투갈,투르크(터키의 한 부족)가 패권을 다툰 각축장이기도 하였다.
1895년 영국이 차지하여 1907년 수도가 케냐로 옮겨지기까지 몸바사는 동아프리카 보호령의 수도로서의 역할에 매우 분주하였다.몸바사에는 두개의 항구가 있는데 섬의 동쪽에 있는 구항은 아라비아,페르시아만,인도 등지에서 교역물을 싣고 오는 범선이나 작은 선박들이 이용한다.아침마다 이 항구로 들어 온 많은 해산물들로 시청사 주변을 생선시장으로 바꿔 버린다.우기가 되면 수십대의 다우범선(돛이 세개달린 범선)들이 이 구항으로 몰려들어 장관을 이룬다.한편 영국이 개발한 킬린디니항은 수심이 깊은 항구로 육지로 둘러싸인 정박지에 16척의 화물선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현대적 항만시설을 갖추었다.
몸바사의 중심거리는 음웸베 타야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이곳이 도시의 중심지로 기능하는 이유는 교통 때문이다.교통문제를 책임지는 감독관이 이 거리 망고나무 아래에서 사파리를 떠나기에 앞서 짐꾼들과 운전사들을 집합시키고 점호를 하는 풍경은 이채롭다.토요일마다 여기서 벌어지는 노상 밴드쇼가 유명하고 여러가지 향신료를 섞은 음식물과 야채를 팔고 있는 저자거리도 볼만하다.
○노상 밴드쇼는 명물
그러나 몸바사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들은 누구나 한번쯤당혹감을 느끼게 마련이다.그것은 여행자가 나이로비에서 비행기를 잘못 타서 회교국가인 아랍에 잘못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거리로 나가면 검은 아바이야차림에 얼굴을 차드르로 가린 회교도 여인들을 일상적으로 만나게 된다.특히 동쪽에 있는 구항에 인접한 올드타운은 좁은 골목길에 조각장식을 곁들인 발코니가 달린 아랍식 주택들과 이슬람사원들이 들어서 있다.좁은 골목은 침입자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고,고층주택들의 지붕은 지난날 포르투갈 침입자들의 공격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몸바사를 통치하던 역대 총독들은 전통적으로 새로 태어난 아기들에게 포대기용 천을,그리고 결혼하는 신부에게는 가운을 주면서 축복하였다.죽은 자에게는 넉 장의 무명천을 선사해 왔다니 인생이 거쳐야 할 통과의례에 통치자들이 꽤나 신경을 쓴 모양이다.통치술 치고는 고차원적이 아니었나 한다.이곳에 살고 있는 회교도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11세기에 몸바사에 상륙하였던 아랍상인들의 후예들이다.그런가하면 수도 나이로비에는 이 나라가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을때 철도부설노동자로 들어왔던 인도인의 후예들이 케냐상권의 대부분을 쥐고 있다.
○인도인 후예 상권 장악
때때로 이런 해묵은 갈등들이 사회문제화 되기도 하지만 아직은 큰 충돌 없이 지내고 있는듯 하였다.케냐의 원주민들은 수백년동안 이런 종교와 문화적 차이를 큰 적대감 없이 수용하기도 하고 조화시키면서 살고 있었다.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심성의 공간적 넓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구항 근처에 있는 부두노동자들의 합숙소 벽면에 나란히 걸려있던 그들의 옷가지와 빨래들을 바라보면서 노예시장은 이제 없어졌지만 아직도 밑바닥 생활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정한은 남루한 옷차림들에 그대로 묻어있다는 생각을 하였다.아랍사원중의 하나인 아우디보라 모스크가 있는 절벽 뒤의 황무지에는 방치해 둔 계단입구가 있다.교역물자를 나르던 범선의 노예들이 비밀리에 드나들었던 곳인데 이 계단이 끝나는 막다른 동굴에는 그들 노예들에게 신선한 물을 공급해 주었던 맑은 샘물이 있다.
우리는인도양의 초록빛 바다가 창문 아래까지 밀려와 닿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휴가를 맞은 유럽인들이 몰려와 여름의 태양과 바다를 만끽하고 있는 호텔 앞의 바닷가에는 몇마리의 낙타를 몰고 다니며 손님을 부르고 있는 흑인과 낙타들의 발길이 무척이나 한가로웠다.<작가 김주영>
1995-04-23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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