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죄거부라니…일본은 차라리 침묵하라”/휴코타지 전 주일 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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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5-02-25 00:00
입력 1995-02-25 00:00
◎“명백한 침략전쟁을 아시아 해방전” 망언/식민 지배 극도 잔학… 피폭책임 일 군부에

일본의 보수·우익세력들은 전후 50주년을 맞아 과거 아시아침략에 대한 반성·사죄를 거부하고 오히려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아시아 해방전쟁」이었다는 망언을 되풀이 하고 있다.일본 우익세력들의 이러한 망언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최근 휴 코타지 전주일영국대사는 산케이신문 기고에서 『일본은 차라리 침묵을 지켜라』고 충고하고 있다.다음은 기고문 내용.

대지진의 비극으로 한 해를 시작한 일본은 올해 전후 50주년을 맞아 쓰라린 코멘트를 많이 듣게 될 것이다.나는 그러나 일본인들이 이러한 논평에 주의깊은 반응을 보이기를 바란다.분노로 성급하게 반응하면 감정이 악화될 뿐 일본의 장기적인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부주의한 발언을 하는 경향이 있는 일본의 정치가들이 위엄있는 침묵을 지키는 노력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올해는 화해에 역점이 두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올해는 승리와 패배를 각각 기리기보다는전쟁이 가져다 준 고통을 공감하고 되새겨보는 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인들은 지금 제2차 대전중 일본제국군대가 점령한 지역의 주민에 대해 일본과 「천황」의 이름으로 얼마나 광범위하게 불행한 일들을 저질렀는지 또 그 행동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되새겨보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군에 포로로 붙잡혔던 사람들 가운데는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취급을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나는 종전직후 싱가포르에서 나의 친척을 포함한 포로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직접 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심정을 알 수 있다.하지만 기독교인은 「너의 적을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나는 화해를 바란다.

우리는 일본제국군대의 일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나는 이곳 영국에서 일본인의 친구로서 일본인은 다른 국민과 이질적이라는 말을 믿지 않음을 말하고 싶다.문제는 인종이나 선천적인 특징이 아니다.나는 일본인 가운데 괴로움을 주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한 군인이 있는 한편 연합국측에 복수심에 불타 문명인으로서의 행동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군인이 있음을 알고 있다.슬픈 이야기이지만 인간에게는 나쁜 짓과 잔학한 행동으로 치달리려는 경향이 잠재해 있다.이 잠재적 요소는 상황과 사상의 교화에 따라 표면화된다.러일전쟁과 1차대전당시 일본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공정한 취급을 받았다.왜 2차대전 당시 일본의 태도와 행동은 돌변했는가.

나의 설명은 이렇다.명치시대의 지도자들은 단결을 강요하고 일본을 구미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신도의 의식과 「천황」숭배를 생각해 냈다.지도자들은 주로 농촌으로부터 징집한 장정들로 강력하게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 위해 잔혹한 신병 이지메(가학행위)를 포함한 엄한 훈련을 강요했다.이지메를 당한 인간이 다시 자신보다 약한 인간을 이지메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사무라이 윤리는 이 과정에서 땅에 떨어졌다.무사도의 진정한 의미는 잃어버렸다.충성심이 변질돼 젊은이들에게는 「천황」을 위해 죽는다는 의식이 심어졌다.하지만 「천황」의 마음이 장군들에의해 강제되고 있는 전쟁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장교들 가운데는 사물에 대한 태도가 비뚤어져 포로에 대해 생물무기 및 세균무기의 실험을 한 자도 있다.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확신한다.나는 민주주의적인 절차와 제도가 일본에 뿌리내렸으며 일본인은 군국주의와 침략전쟁에는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고 믿는다.일본 헌법 9조(교전권과 집단자위권을 인정하지 않음)가 개정된다해도 일본의 평화에의 서약은 지켜질 것이다.

물론 항상 위험은 있다.그 가운데는 전쟁중 일본의 행동을 정당화 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할 위험도 있다.

때때로 일본의 동남아시아점령은 서구의 식민지 지배가 빨리 끝나도록 했다며 정당화 하기도 한다.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식민지 지배는 전쟁전에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다.영국은 그 이상 식민지 지배를 유지할 경제력도 의지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게다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영국의 지배보다 훨씬 가혹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원자폭탄에 대해서는 우리는 투하된 뒤에조차 일본정부가 항복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쇼와(소화)일왕의 개인적인 개입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일본의 군사 지도자들은 「천황」의 항복방송마저 막으려 했던 것이다.원폭으로 죽은 사람들과 피폭자에는 동정하지만 나의 견해로는 히로시마의 비극의 최종적인 책임은 일본의 군사 지도자들에게 있다.

▷약력◁

■1924년 영국 요크셔 출생

■세인트 앤드루스대,런던대서 수학 일본어로 학위취득

■1949년 영 외무부 근무시작

1980 ∼ 84년 주일본대사 역임

■저서「황금의 섬들,일본의 고지도」

「동의 섬나라,서의 섬나라」

「속 동의 섬나라,서의 섬나라」
1995-02-25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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