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봉동굴 머리뼈 복원한 「흥수아이」(한국인의 얼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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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4-10-21 00:00
입력 1994-10-21 00:00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 맨 먼저 자리잡은 인류는 전기구석기인이다.그 시기는 대략 지금으로부터 70만년전이다.그러나 전기구석기인이 남긴 몸골의 흔적은 아직 찾지 못했다.다만 중기구석기와 후기구석기시대를 살았던 선사인의 뼈가 출토되고 있을 뿐이다.남북한을 통틀어 10여군데 유적에서 이 뻐가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당시 사람모습을 살려내는 데 필요한 얼굴관련 뼈화석은 몇점에 지나지 않는다.4만년전 중기구석기시대 것으로는 충북 청원 두루봉 출토 어린이 머리뼈가 있다.그리고 북한의 평양 북쪽 승리산에서 나온 아래턱뼈와 역시 평양교외 만달리유적 출토 머리뼈는 1만년전에 끝난 후기구석기시대 뼈화석으로 판명되었다.남북한 고고학자들은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뼈화석을 자료로 구석기인의 얼굴을 복원해냈다.
충북 청원군 두루봉 동굴의 어린이는 아주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다.고고학계가 얼굴을 복원하고나서 지어준 이름은 「흥수아이」.죽은 지 4만년만에 얻은 이 어린이의 이름은 두루봉에서 석회석을 채굴해온 한흥광산 현장소장 김흥수씨 이름에서 따왔다.그의 제보로 구석기유적이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에 그 공헌도를 기려 명명된 이름이라 할 수 있다.흥수아이에 대한 체질인류학 분석결과 5살때 이 동굴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아이의 머리크기는 1천2백∼1천3백㏄,키는 1백10∼1백20㎝ 정도로 헤아려졌다.특히 뒤통수가 튀어나와 요즘의 말로 표현하면 짱구형.아래턱도 둔탁하게 보인다.머리뼈를 잰 결과는 현대인과 선사인의 특징을 함께 지닌 것으로 드러났다.학계는 흥수아이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되면 구석기인이 옮겨다닌 발자취와 우리 조상의 기원문제를 풀어줄 고리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흥수아이가 살던 시대에도 구석기인은 문화행위를 발전시켰다.그 같은 정황은 장례의식으로도 나타났다.지난 1983년 발굴당시 흥수아이의 주검은 편편한 석회암 낙반석 위에 누워 있었다.일부러 바로 펴놓은 주검위에다가 고운 흙을 뿌렸다는 사실이 관찰되었다.주검을 아무렇게나 마구 버리지 않고 고이 장례를 치러준 것이다.그 까닭은 구석기인도 영혼이 영생하는 사후세계를 믿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흥수아이의 주검 곁에서는 여러 종류의 식물꽃가루가 채집되었다.이들 꽃가루 분석에서 국화꽃가루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다.그래서 흥수아이가 죽었을 당시 국화꽃이 주검 주변을 치장한 장의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또 국화꽃이 가을꽃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흥수아이가 죽음을 맞은 계절을 가을로 추정했다.꽤 높은 고지대 석회암동굴에 국화꽃이 자생할 리 만무하고 보면 국화꽃을 분명히 의도적으로 꺾어왔을 것이다.
주검을 꽃으로 치장한 실례는 이라크의 구석기유적 샤니다르동굴에서도 발견되었다.이 역시 꽃가루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서 확인된 것이다.구석기인은 장의용 말고도 일상생활을 통해 꽃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그 같은 증거를 남긴 유적은 앞서 이야기한 바 있는 사슴뼈조각 인물상 출토지 청원 두루봉동굴(서울신문 94년10월14일자 11면)이다.
이 동굴에서는 많은 양의 진달래꽃가루가 채집되었다.진달래꽃가루가 집중적으로 검출된 장소는 동굴입구 한쪽 모서리다.진달래는 본래 호산성식물.그런데 두루봉일대는 알칼리성 토양으로 되어 있다.이는 바로 두루봉동굴에 살았던 구석기인은 꽃을 좋아한 나머지 다른데 멀리서 꽃을 꺾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인류는 태초부터 아름다움을 식별하는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황규호기자>
1994-10-21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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