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를 맞으며/김광언(일요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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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4-09-18 00:00
입력 1994-09-18 00:00
여름 짓는 일을 하늘 아래 으뜸가는 업(농자천하지대본)으로 삼아온 우리 겨레는 한가위를 가장 큰 명절로 손꼽아 왔다.설 대보름,수릿날 따위의 명절을 아니 쇤것은 아니었지만 정월은 농사 시작의 달인지라 자연 마음이 조이고 수릿날은 농작업의 힘겨운 마루턱에서 한숨을 돌리는 판이라 느긋할 수가 없었다.「오월 농부,팔월 신선」이라는 말 그대로 기껍고 뿌듯하고 먹지 않고도 배 부른 명절은 한가위뿐이었던 것이다.이를 맞는 기쁨이 얼마나 크고 설렛으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일렀겠는가.

우리가 이날을 명절로 삼은 것은 적어도 삼국시대 초기 이전부터다.

신라 셋째 임금인 유리왕때(32년) 두 공주가 성안 부녀자들을 각기 거느리고 칠월 보름부터 한달 동안 두레 삼기 내기를 해서 진쪽이 한턱을 내었으며 그 잔치를 가위라 불렀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은 우리가 다 잘 아는 터이다.7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책 「수서」의 「팔월 보름이면 왕이 풍악을 베푼다」는 내용도 신라 궁중의 한가위 풍속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우리와중국 그리고 일본은 예부터 같은 문화권을 이루어 왔지만 한가위를 오직 우리만 손꼽은 사실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앞에서 한가위를 「더도 말고 덜도 말기」를 바라는 명절이라 했지만 이날을 우리가 언제나 배 두드리며 쇤 것은 아니다.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무렵에는 돈이 달린 정부에서 전공무원들에게 봉급을 주지 못하고 그대신 보리쌀을 배급하는 지경이었다.

우리집은 방이 넷이나 딸린 큰 집(?)이었던 데다가 할아버지 아버지 두 분이 체신부 공무원이었던 만큼 살림 형편은 중상류에 이를만 하였음에도 송편조차 빚을 수가 없었다.중학교 2학년이던 내가 휘황한 달빛이 마당에 가득찬 한가위날 밤 홀로 마루 끝에 앉아 「송편도 없는 한가위」를 그지없이 처량하게 느꼈던 것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우리 집이 이러하였으니 당시 국민 거의 모두가 「배고픈 한가위」를 맞았음에 틀림없다.

시대가 바뀌고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서 한가위 풍속도 크게 달라졌다.공휴일이 사흘로 늘어나면서 고향을 찾는 인파가 구름처럼 늘어나서 이른바 「민족의 대이동」이 벌어진다.더구나 올해에는 일요일까지 이어져서 적어도 2천5백만 이상이 움직이리라 한다.따라서 이들이 끌고 나서는 자동차들은 전국의 도로를 메우고도 남을 것이다.지난해에는 서울서 대전까지의 2백여㎞에 8시간 반이 걸렸으며 그 사이에 자동차가 15% 늘어난 것을 생각하면 올해에는 열시간을 잡아야 한다는 보도다.「고생길」이던 귀성길이 이제는 「지옥길」로 바뀌었다.그리고 고속도로변은 다시 인분과 소변의 바다를 이루고 쓰레기는 산처럼 쌓일 것이다.정부에서 버스 전용차선제와 요금을 휴게소에서 내는 중불제 따위의 대책을 세웠지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겉으로 보면 한가위 명절은 더할 수 없이 풍요롭게 느껴지지만,실상은 썰물처럼 도시로 빠져나갔던 농촌 사람들이 고향 나들이를 하느라 법석을 떠는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이날 베풀어지던 행사는 자취를 감추었고 명절 놀이를 펼치는 마을조차 드물어졌다.

예전의 한가위는 우리 모두의 명절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이산가족 상봉의 날로 쪼그라들었다.한가위의 거품만 남고 알맹이는 없어져버린 느낌이다.

이제는 우리가 한가위의 참뜻을 되새겨 볼 때이다.농사의 풍년을 가져다 주신 조상님의 음덕에 감사하고 한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으며 단란을 누린 예전의 차분하고 정겨웠던 한가위,이웃과 즐거움을 나누고 한껏 신명 떨음을 펼쳐서 흥겹고 기쁨에 찼던 한가위.이러한 명절을 되찾아야 한다.그리고 많은 사람의 기꺼움 뒤에는 반드시 적지 않은 이의 서러움이 서리는 법.찾아 주는 이 없는 불우 시설에 몸을 담고 있는 분들도 한번쯤은 기억해 둘 일이다.<인하대교수·민속학>
1994-09-18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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