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에서 본 가야」… 김원룡박사 유고논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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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4-07-18 00:00
입력 1994-07-18 00:00
우리나라 고고학 개척자인 고금원용박사(전서울대 대학원장)의 유고논문이 최근 학계에 공개되었다.그가 지난해 12월 작고하기 전에 써놓은 이 논문은 「가야문화」제5집(가야문화연구원간)에 실린 「고고학에서 본 가야」.삼국역사에 따라 붙었기 때문에 빈약할 수 밖에 없는 가야사를 유적과 유물을 통해 문화사 측면에서 복원했다.
이 논문은 우선 가야가 성립하기 직전단계의 문화를 경남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 찾았다.기원 전후 낙동강 하류지역에 세력자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 바로 다호리 1호분이라는 견해.이 무덤에서는 초기철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로 넘어가는 문화전환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특히 출토품 붓을 한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물로 평가했다.
그 다음에는 경남 김해 양동리 일대에 축조된 고분군에서 가야문화의 여명을 추적했다.그러나 전시대(1세기)처럼 피장자들이 제정일치의 지도자 범부를 크게 벗어나지못했다는데 주목했다.양동리 90호분에서 철제무기류가 2점 출토되었지만 양이 너무 적다는 사실은 피장자를 새로운 시대의 무인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3세기가 되면 사회계층화가 두드러지게 진행되는 것으로 밝혀내고 그 증거로 경남 김해 양동리 31·33호분 출토 고리칼(환두대도)을 제시했다.또 3세기 후반의 무덤인 8호분에서는 가시달린철기(유극철기)가 나오는데,이들 철기류는 신부의 고귀를 상정하는 유물로 판단했다.중국 위의 명제(AD 226 ∼ 239년)가 대방군을 통해 삼한의 지배자들에게 읍장 관호를 준 것도 이 시기.그래서 국제적으로 군국의 자격을 인정받는 시기도 바로 3세기라는 주장이다.
삼국이 정립하는 4세기부터 가야지역에는 으뜸덧널과 달린 덧널(주·부곽)을 갖춘 대형 무덤들이 출현한다.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이 그러한 유적.14호분의 큰칼,도끼,철촉,바람개비,유리옥,가죽방패가 나왔다.그리고 39호분에서는 갑옷과 말재갈,3호분에서는 갑옷과 투구가 출퇴되었다.이로써 전시대 지배자들과는 달리 기마전을 수행할 수 있는막강한 실력자로 변모한다는 것이다.
이어 5세기초는 고구려의 남하에 따라 신라와 가야가 군사적 충격을 받는 시기로 해석했다.이 때문에 지배자들이 근대화 내지 무장화를 서두른 것으로 보면서 그 흔적을 경남 함안 가야읍 널무덤을 통해 들추어냈다.이 무덤에서는 중기병의 위세를 실감케하는 말갑옷 1벌이 출토되었다.또 다른 5세기 중반의 무덤인 부산 복천동 11호분에서는 큰고리칼에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수장이 말투구를 갖춘 말위에 올라앉은 모습을 그릴수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나왔다.
가야에서 5세기는 중요한 시기로 보았다.5세기 후반에 들어 축조된 경남 합천 옥전 3호분에서 나온 용봉문양의 큰고리칼 등 14점의 큰칼을 당시 경제력에 연관시켰다.특히 이 논문은 5세기 후반부터 산위에 나타난 경북 고령 지산동 44호분과 같은 거대한 무덤에 관심을 돌렸다.이는 가야 중심세력이 남쪽 김해지방에서 북쪽 고령지방으로 옮겨진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그래서 고령지방에서 비로소 대가야라고 쓴 「대」자가 결코 허세가 아니라는 입장.이 시기는 실제 가야가 통일왕국으로 발돋움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나서 6세기에는 가야가 막을 내린다고 결론지었다.그같은 정황은 지산동 가야 왕족묘지 이웃에 가야를 대신한 백제식 ㄱ자 돌방무덤들이 축조된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황규호기자>
1994-07-18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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