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해 인간」의 영안/이목희 정치부기자(오늘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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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4-05-27 00:00
입력 1994-05-27 00:00
심명보의원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묘한 감정에 빠졌다.단지 「아깝다」거나 「아쉽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되새김,심의원이 벌써 하늘나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그것은 차라리 「분노」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92년 초여름 건강진단이나 받아본다고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던게 이렇게까지 이어질 줄이야….

고 심의원을 향한 감정이 이렇듯 흐르는 것은 그가 너무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발로 뛰는 기자」를 자처하며 언론인으로 20년,이어 가까운 친구의 권유로 나라일에 나서 정치인으로 15년.참으로 열심히 산 그였다.하지만 언론인,정치인이기에 앞서 「인간」이 훨씬 돋보인 일생이었다.

남의 어려움을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발벗고 나서곤 했다.언론숙정이 한창이던 지난 80년 한국일보 편집국장 때 한명의 후배라도 「더 살리려고」 이른바 「실세」앞에 무릎까지 꿇었던 일.곧 이어 집권당 대변인 총재비서실장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여야 정치권은 물론,각계의 길흉사를 앞장서 챙긴 일등.그의 인간적인 일화는 일일이 열거할수 없을 만큼 많다.그리고 그의 사무실 칠판에는 늘 「적덕지가 필유경」이란 글이 씌어있었다.

그는 생전에 틈만나면 고향 얘기를 했다.강원도 두메산골(영월군 주천면)에서 태어나 주천농고를 나왔다.거기서 서울대 법대를 들어갔으니 입지전적이라 부를만 하다.어려웠던 과거와 단종애사를 간직한 아름다운 고향이 그를 「무공해 인간」 「의리의 사나이」로 만든 것 같다.

남에게는 그리 관대해도 스스로에게는 엄청나게 엄격했다.한창 때이던 86년 큰며느리를 맞으면서 가까운 친척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은 지금도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 내려 온다.

그의 장례는 26일 국회장으로 엄수됐다.고인은 타계직전 『여러 사람 번거롭게 하지말고 가족장을 지내라』고 유언했다 한다.마지막 가는 길까지 나보다 남을 생각한 것이다.그를 너무나 아끼던 동료의원들의 간절한 뜻으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이만섭국회의장은 이날 영결사에서 『자신에 대해 가혹하리만치 엄격하던 고인의 발자취는 후배 언론인과 정치인의 마음속에 영원히남을 것』이라고 했다.김종필민자당대표도 『생전에 희망했듯 이제 고인의 이름과 수많은 업적은 고향의 품에서 모든 이들에 의해 오래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애도했다.
1994-05-27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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