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일러식 평양독도법/황병선(데스크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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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4-04-22 00:00
입력 1994-04-22 00:00
평양을 1주일 남짓 방문하고 돌아온 한 미국 학자가 전하는 「오늘의 북한」얘기를 들으며 솔직히 머리속이 혼란스러워 지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그래 북한은,아니 김일성은 이 「핵사태」를 어쩌겠다는 것인지 더욱 아리송해 질 뿐이다.

워싱턴소재 전략및 국제문제연구소의 부소장인 윌리엄 테일러씨는 북한에서 전쟁준비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한 식당에 들어가 보니 음식도 풍성했다면서 평양측 핑크빛 「평화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김일성주석을 3시간 가까이 면담한 그는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생각이나 능력이 없으며 「남쪽의 동포」를 먼저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메시지를 곧이곧대로 전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전한 북한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이냐이다.

그는 92년에 이어 김주석 면담이 이번이 두번째다.또 북한을 모두 네차례나 방문한 경험이 있다.국제문제 전문가요 북한에 대해 이정도 경험을 가진 인사의 얘기라면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안스러운 얘기이지만 그가 전하는 말은 우리가 알고싶어하는 정보는 별로 없고 평양측 「평화 제스처」만 담고 있는것이 아니냐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테일러부소장이 국제문제전문가로서 한반도라는 「현장」에 뛰어든 동기 자체는 순수할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그가 김주석 82회 생일에 즈음한 북한의 「핵사태 돌파를 위한 평화공세」에 이용당하고 있는것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듣다.

이번 핵사태를 어떻게 해서든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며 북한을 고립시키기보다 국제사회로 이끌어내 「순치」시키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그의 충고는 귀기울일만한 것이다.

그러나 평양을 읽는 독도법에는 한 핏줄로서,그리고 오랜 체험에서 얻어진 우리 나름의 비방이 있다.테일러부소장은 판문점 부근 북의 한 마을에서 주택·학교·옥외변소 그리고 뛰노는 닭들을 보고,또 학생들을 만나보고 자신이 60년대초 미군장교로 복무했던 경기도 운천의 한마을이 연상되더라고 했다.그러나 이대목에서 90년 10월 남북총리회담을 취재하느라 평양을 방문했을때 그들의 「안내」에 따라 돌아본 「예정된 장소들」인북한의 모습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테일러씨 역시 북한은 스케줄에 따라 안내원이 보여주는 곳밖에 볼수 없는 땅이라는 사실을 잘 알리라고 본다.그가 본 마을은 비무장지대에 세워놓은 선전용 마을임을 우리는 안다.전쟁준비 기미를 전혀 느낄수 없었다고 했지만 안내받아 둘러보는 외국인눈에 띄게 전쟁준비를 할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겠으며 역시 안내받아 갔을 식당에 풍성한 음식이 없을리 있겠는가.북한은 6·25직전에도 외국인 눈에는 전혀 전쟁을 준비하는 나라로 비쳐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4차례 평양과 북한일대의 「전시장」만 돌아보고 또 미국과 세계를 향해 북한지도자들이 하고 싶은 얘기만 들었는지 모른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김주석이 하는 「비둘기」얘기나 사람사귀고 낚시하러 미국에 가보고 싶다는 여유있고 평화스러워 보이는 고도의 전술적 한담이 아니다.핵무기를 개발할 생각도 없는 그들이 국제원자력기구가 핵시설에 설치한 봉인들은 왜 뜯었으며 대남방송을 통해 날이면 날마다 「남조선 괴뢰와 미제국주의자」들이 침략전쟁을준비하고 있다고 위기감을 조성하면서 외국방문자의 눈에 그토록 평화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이유가 역으로 궁금한 것이다.

북한당국자의 발언이 필요와 경우에 따라 진실과 프로퍼갠더,그리고 거짓 사이를 아무런 가책없이 자유자재로 오간다는 사실을 미국사람들은 별로 괘념치 않는것 같다.그래서 우리는 한국이 배제되는 미·북한만의 대화를 항상 염려스러워 하는지 모른다.테일러 부소장이 언론에 공개하지 않은 얘기를 따로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의 평양독도법은 최근의 북한을 바로 읽으려는 사람들을 오히려 혼란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을 지적치 않을수 없다.<국제1부장>
1994-04-22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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