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용개척자 배구자 새롭게 조명/미래춤학회「우리춤 선구자」학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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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4-02-26 00:00
입력 1994-02-26 00:00
월북무용가 최승희와 함께 근대무용의 개척자 정도로만 알려진 무용가 배구자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이 처음 이루어진다.
한국미래춤학회는 26일 하오2시 문예진흥원강당에서 「우리춤의 선구자를 말한다」주제의 학술모임을 갖고 배구자의 역할과 의의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갖는데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우리 근대춤의 효시가 과연 누구인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일 예정이다.
이날 발제자로 나서는 단국대 유민영교수는 미리 발표된 「신무용 개척자 배구자 누구인가」에서 배구자는 1905년 출생,11세에 일본의 대표적 곡예단인 덴가츠예술단과 함께 도일해 이 곡예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배구자는 곡예단에 회의를 느껴 탈출했으며 미국유학차 1928년 4월 장곡천정공회당에서 고별음악무도회를 가졌고 이무대에서 한국전통무용을 현대적으로 개량한 「아리랑」과 함께 안나 파블로바작 「빈사의 백조」「집시댄스」등을 선보였다는것.
배구자는 이후 결혼으로 미국행을포기,1929년 배구자무용연구소를 세워 30대 후반까지 국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고 말했다.
유민영교수는 최승희가 창작무용연구소를 개설한 것은 배구자보다 2년뒤인 1930년이었고 발표회등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도 배구자보다 2년쯤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배구자가 신무용의 선구대열에서 제외됨은 무용만을 고집하지 않은채 활동무대가 넓었고 활동도 지속적이지 못했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무용평론가 박용구씨는 배씨의 1928년 고별공연은 한국무용무대에선 처음으로 서양무용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무용을 소재로한 창작무용을 선보여 한국근대무용의 효시로 봐야한다』고 밝혔다.
박씨는 이와함께 『최승희가 무용의 예술적 순수성에 치중했다면 배구자는 대중속에 파고드는 직업성을 중시했다』면서 배구자의 업적과 예술관이 새롭게 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김성호기자>
1994-02-26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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