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한국인 먼저 되자/한영우(일요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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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4-01-16 00:00
입력 1994-01-16 00:00
○설부른 국제화 경계
경제의 국경이 없어지는 시대에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그런데 그 방법이 국제화,세계화요,세계인이 되자는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이제는 국가니 민족이니 우리 것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걷어치우고 외국의 흉내나 내면서 살자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여질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UR로 상징되는 세계질서의 새로운 개편이 우리에게 희망과 기회를 키워주는 측면도 있지만 아직 경제,기술분야에서 뒤져 있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더 크다.특히 초강대국 일본·중국과 함께 동아시아 경제블록에 묶이게 될 가능성이 큰 우리의 경우는 경쟁력 강화를 통한 생존전략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이러한 시기에 섣부른 국제화,세계화는 제2의 망국으로 갈 위험성도 적지않다.
밖으로 나갈수록 집안단속을 잘하고 철저한 정신무장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상대를 잘 알고 나를 잘 알아야 백전백승한다는 손자의 병법도 있지 아니한가.원심력이 커질수록 중심을 잡아주는 구심력이 똑같은 비중으로 커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구심력에 대한 방안은 없이 원심력만 키워 놓는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진단할 때 흔히 빠지는 오류는 구심력의 바탕이 되는 민족문화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간과하는 일이다.다시 말해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처럼 전통문화가 심하게 파괴된 나라가 없다.이는 유물의 파괴만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전통문화에 별 가치를 두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에 더 큰 문제가 있다.
○법고창신정신 필요
새로운 것은 옛 것을 배우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 철칙이다.이것이 이른바 법고창신이요,서양식 말로 르네상스다.
우리가 지금 전세게를 무대로 열심히 뛰면서도 새로운 것을 많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법고창신의 정신이 부족한데 원인이 있다.일본이 앞서가고 있는 것은 일본상품 밑에 일본혼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일본처럼 전통문화가 잘 보전되어 있고 그것을 상품으로 활용하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문화,특히 민족문화를 소홀하게 생각하면서 과학과 기술을 장려한다고 갑자기 창의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세계인이 되기 전에 먼저 철저한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세계가 따로 있고 한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한국속에서 세계를 찾아야 한다.세계는 공간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며 그 내용은 여러민족,국가의 다양한 특수성의 복합체일 뿐이다.그 특수성이 공간을 초월하여 공감을 얻을 때 세계적인 것이 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특수하면서도 세계적 공감을 얻을 것들이 무수히 많다.우리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강대국 중심으로 개편될지도 모를 세계질서를 정의롭게 바로잡을 새로운 가치관의 창조까지도 내다보아야 한다.
사람은 배고플 때는 빵을 그리면서 살지만 생활이 넉넉해지면 이상을 찾아서 산다.지금은 이상을 세울 때다.
강대국을 쫓아가는 것이 반드시 이상은 아니다.그 이상의 모델은 조그만 나라에서도찾을 수 있고 가까이 우리 조상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다.
○문화복흥 서두를때
우리는 이웃 나라와 평화공존하면서 당당하고 선진적인 문화국가로 살아온 역사전통이 있다.천만금을 주고도 살수 없는 문화자산을 물려받고도 이를 활용할 줄 모른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UR태풍이 몰아닥친다 해서 국제화,세계화를 서둘 일이 아니다.오히려 신토불이의 정신을 농산물에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교육·문화 각 방면에 확산시켜야 한다.이제야말로 민주문화를 바탕으로 한 경제,즉 문화경제가 뿌리를 내려야 할 때이다.
그리고 법고창신의 문화복흥을 서두를 때이다.<서울대교수·국사학>
1994-01-16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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