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백제설(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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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3-09-24 00:00
입력 1993-09-24 00:00
「한국사에 있어 삼국시대라고 알려진 시기는 사실상 사국시대였다.고구려·신라·백제외에 또 하나의 국가,즉 비류백제가 있었다.충남이남을 근거지로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이던 비류백제는 4세기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략을 받고 멸망한다.비류백제의 왕과 신하·백성들은 당시 그들의 식민지인 위 열도로 건너가 새 나라를 세우니 이가 곧 일본국의 시작이다」
위의 내용은 재야사학자인 김성호씨(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원)가 지난 82년 출간한「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에서 주장한 학설이다.한·일 양국의 고대사 연구에 있어 가히 혁명적이랄 수 있는 이「이론」은,그러나 발표된지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옳고그름을 가리는 검증과정을 거치지 못한채 아직 극단적인 찬반의 양론속에 묻혀 있다.
기성 사학자들은 대부분 『언급할 가치가 없는 주장』이라며 아예 무시하는 반면 많은 재야사학자들은 열광적인 지지를보내고 있다.다만 90년대 들어 김씨의 논문들이 박영석국사편찬위원장·박성수정신문화연구원 교수·최재석고려대명예교수등 원로 사학자들의「화갑」「정년퇴임」기념논문집에 잇따라 게재됨으로써 그가 이제서야 사학자로서「공인」받는게 아닌가 추측될 뿐이다.또 일부 학자들이 최근「비류백제설」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의사를 보이는 것도 큰 변화이다.
「비류백제설」은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나오는 비류·온조 형제의 건국기록에서 출발한다.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비류·온조 형제는 고구려의 첫 임금인 주몽의 의붓아들이다.주몽의 친아들인 유류(또는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오자 남쪽으로 내려가 각각 나라를 세웠다.형인 비류는 미추홀에,온조는 위례성에 도읍했는데 미추홀이 척박해 나라를 유지하기 힘들게 되자 비류는 자살했다.반면 비류쪽의 백성을 받아들인 온조의 나라는 더욱 강성해졌으며 후에 백제로 이름을 정했다』
정사에는 이처럼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것으로 기록된 비류의 건국기에 대해 김성호씨는 한·중·일 3국의 각종역사책에서 단편적인 기록들을 끌어모아 전혀 다르게 구성했다.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비류는 자살한 것이 아니다.그가 충남 웅진(현재의 공주)에 세운 비류백제야말로 한강 중부지역에 자리잡은 온조백제보다 강성했다.한반도 안에서는 호남 전역과 제주도,경남의 해안지역,서해 건너 황해도일대를 다스렸다.특히 일찍부터 해상진출에 눈떠 일본의 북구주 일대와 중국의 요서지방및 양자강일대에 진출했다.비류백제는 해외영토에 식민통치기구인「담로」를 설치해 통치자로서 왕자·왕의 동생등 친족을 파견했다.
이처럼 강성했던 비류백제가 일시에 멸망한 것은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동원,서해를 건너와 왕성을 기습공격했기 때문이다.겨우 목숨을 부지한 왕은 신하와 백성들을 이끌고 혈족이 다스리던 위 열도의 담로로 달아나 새나라를 열었다.비류백제의 영토와 백성은 형제국인 온조백제가 차지했다.온조백제는 이후 역사책을 만들면서 자체 역사에 비류백제사를 섞어놓아 비류백제는 결국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같은 엄청난「이설」은 과연 무엇에 근거할까.다음 회에 알아본다.<이용원기자>
1993-09-2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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