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야만/정복근 극작가(굄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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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3-01-19 00:00
입력 1993-01-19 00:00
어느 여자고등학교 교실벽에 「방귀는 화장실에서」라는 쪽지가 붙어있는 것을 봤다고 누군가가 이야기해준 일이 있다.

소녀들다운 깔끔함이 느껴지는 말이어서 재미있게 여겼었는데 가끔은 어른들도 「가래침은 화장실에서」라고 쓰인 안내문을 거리의 게시판마다 붙여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자기의 몸 안에 있던 물질을 몸밖으로 내어놓는 일은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하게 처리하는 것이 우리의 오랜 생활습관이며 예절이다.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있는 무안하고 부끄러운 생존의 조건을 될수 있으면 눈에 띄지않는 장소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일은 남을 존중하는 예절이기에 앞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는 또 다른 본능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름답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키는 것이 어떤 점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수도 있다는 방어본능 때문에 의상이 발달하고 주택중에서 화장실이 차지하는 비중이 또 그렇게 중요했던 것일게다.

자신이 지닌 다른 종류의 배설물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밖으로 내놓으라고 요구하면 틀림없이 모욕감을 느낄 수많은 점잖은 사람들이 아무데서나 함부로 무심히 요란하게 가래를 돋궈 시원하게 뱉어내는 것을 볼때마다 나는 화를 낸다.자신이 지닌 더러움을 휘둘러서 자기자신과 타인을 함께 모욕할 권리가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곰곰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일상에서 발견되는 이런 종류의 작지만 수많은 야만과 폭력도 결국은 우리의 생존을 힘들고 역겹게 하는 장애조건이 된다.

보다 나은 삶,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구부러진 정치,부조리한 세상과 맞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무지와 야만을 조용히 말끔하게 지워가는 노력이 필요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1993-01-19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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