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용/사사로운 청탁 아무도 못꺼내(역사속의 청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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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2-12-31 00:00
입력 1992-12-31 00:00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끈 명상 유성용(1542∼1607)은 드물게도 영의정의 지위에 있을 때 염근이,즉 청백리에 뽑혔다.

그는 오랫동안 정승을 지냈음에도 청빈하기가 가난한 선비와도 같았으나 당시 북인들은 그를 재물을 탐하는 오이로 무고하곤 했다.이에 정승의 자리에 있던 이항복이 그의 누명을 벗어주기 위해 청백리로 천거했던 것이다.

그는 본래부터 성품이 겸손하고 온화하여 평생 남에게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다.그럼에도 정사를 공평정대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사사로운 청탁은 감히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도체찰사때 여러 고을에 공문을 발송할 일이 있어 이를 역이에게 주었다.그런데 사흘이 지난 뒤 공문내용 가운데 일부 내용이 잘못된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공문을 급히 회수토록 했다.그런데 지난번 공문을 역이가 발송하지 않고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이에 유성용이 역리의 무사안일을 준엄하게 꾸짖자 역리는 「옛말에 조선공사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삼일후면 다시 공문을 고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발송을 늦추고 있었다」고 말했다.그러자 유성용은 그를 탓하기는 커녕 「가히 세상을 깨우쳐 주는 말」이라면서 대인으로서의 도량을 보여주었다.

그는 또한 평상시에도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 남에게는 공경하는 자세로 임했다.설혹 집안의 자제들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을 대할 때는 몸을 기대는 등 자세를 흐뜨리지 않았으며 탐욕스럽거나 인색한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가 죽기 전날밤 임금은 그의 병 구완을 위해 전의를 내려 보냈으나 「그렇잖아도 임금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는데」라며 간곡히 사절했다.자신은 이미 소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죽으면서 머리를 임금이 계신 쪽으로 북향을 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공이 아니면 우리들의 씨가 없어졌을 것」이라며 임란중 그의 노고를 추모했다.

유성용은 항상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정치의 근본을 삼도록 간했으며 선조는 그의 말을 소중히 여겨 「경을 바라보면 절로 경의가 생긴다」며 각별한 애정을 나타내곤 했다.
1992-12-31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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