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의 끝없는 싸움/전미옥 대우중공업 홍보실(일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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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2-12-25 00:00
입력 1992-12-25 00:00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는 「책을 기억의 확장이자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정의했다.그의 말대로라면 내가 몸담고 있는 일터는 기억과 상상력이 가득찬 곳임이 분명하다.때때로 나의 이 고급스러운 일터에 쏠리는 이웃들의 부러운 시선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대기업의 홍보실에서 근무하는 덕분에 남들은 취미삼아 읽는 잡지며 책들을 하루에도 몇권씩이나 봐야 한다.눈이 시리도록 온갖 활자들과 씨름하는 일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바쁜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혹은 늦은 아침을 먹고 난 뒤 휴일 하오 소파에 앉아 손에 잡은 한권의 책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감을 안겨다 줄 수 있다.그러나 종업원들이 보내온 글이나 신문·잡지등에 실린 글을 스크랩하고,책방 주변을 서성이며 각종 기획기사 거리를 간추려내는 일은 해방감과는 거리가 멀다.

이곳에서 일하면서부터 책을 읽는다는 것을 고통스런 노동으로 느끼게 됐다.불과 몇년전 청계천 헌 책방을 전전하던 때엔 남의 손때 묻은 책이라도 감지덕지했었다.멍석을 깔아주니 게을러지는 것일까.나는 요즘 주위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책더미의 틈바구니에서 자꾸만 멈칫거리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활자매체에 들러싸여 질려버린 나에게 한가지 일탈의 기쁨이 있다면 그건 책 치우기이다.틈만 나면 서랍안에 가득찬 원고들과 천장까지 높이 쌓아올린 책들을 치운다.그것들을 치우고 나면 막혔던 속이 트이고 고통이 덜어진다.만약 사람에게 전생이 있다면 아마도 나는 무던히도 책읽기를 싫어했던가 보다.그래서 이세상에서 숨막히도록 책에 짓눌려 사는 운명이 된게 아닐까.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하면서 지난 한주일 동안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책들을 어떻게 하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릴 수 있을까 골똘히 궁리해본다.
1992-12-25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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