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증후군/유재원 외대교수·언어학(굄돌)

  • 기사 소리로 듣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공유하기
  • 댓글
    0
기자
수정 1992-04-03 00:00
입력 1992-04-03 00:00
그리스어를 전공하다 보니 자연히 서양 고대사에 대해 많은 것을 공부하게 된다.서양 고대사 중에서도 특히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위대한 제국들이 붕괴되어 가는 과정이다.왜냐하면 위대한 제국의 몰락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위대한 제국의 흥망에는 일정한 틀이 있는 듯하다.우선 초창기에는 별로 두드러지지도 않은 조그만 나라가 끊임없는 자연과 외적으로부터의 위기를 초인적으로 극복해 나간다.이 시대의 인물들은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들로 부각된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위기를 극복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제국의 붕괴는 시작된다.페르시아의 침입을 물리친 고대 그리스나 전 지중해 지역을 정복한 로마 제국의 예에서 보듯 강력한 외적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국내 정치인들은 개인적 야심을 품게 되고 국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한다.이에 따라 국민의 기강은 해이해지고 내란이 시작되는 것이다.바깥의 적과 싸우는 것과는 달리 이웃과 친지를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내란은 국민들의 가장 고귀한 단결 의식을 여지없이 붕괴시켜 버린다.인간성은 피폐해지고 끝내는 가치관의 혼란과 도덕적 타락이 제국의 뿌리를 갉아 먹기 시작한다.

또 내란은 경제적 쇠퇴를 가져 온다.전쟁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경제 활동은 위축되고 생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또 이런 과정에서 곧잘 전염병이 창궐하여 심각한 인구감소를 유발시킨다.인구의 감소는 곧바로 노동력의 부족 현상을 가져 오고 그 결과 경제적 쇠퇴가 가속화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이 악순환의 고리가 완성되면 제국의 멸망은 기정 사실화되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민족의 침입뿐이다.정치적인 진공 상태에 국민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고 더이상 제국 스스로가 회생의 길을 찾지 못할 때 이 민족의 침입은 어쩌면 유일한 해결책인지도 모른다.그러나 더이상 지구상에 그 위대한 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그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러한 제국의 붕괴 과정을 이번 총선을 치르면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나의 주제넘은 노파심인지도 모른다.그러나 절대 빈곤이라는 민족적 위기를 겨우 넘긴 우리 나라가 정말 주제넘게 세기말적 현상을 보이는 것같은 의구심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1992-04-03 1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
원본 이미지입니다.
손가락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확대해 보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