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식속 방황하는 소수민족(탈공산주의 소련을 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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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1-09-20 00:00
입력 1991-09-20 00:00
소연방의 해체와 함께 출신공화국을 떠나 모스크바의 연방정부 등에서 일하고 있는 고급엘리트들에게 심각한 고민이 생겼다.모스크바에서 계속 일을 할 것인가,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하는 문제다.보다 심각한 것은 모스크바 인구의 약20%에 달하는 비러시아민족,비러시아공화국에서 일하고 있는 러시아주 모두에게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이 만족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데 있다.
소연방의 붕괴로 발트3국과 우크라이나·우즈베크스탄·아르메니아·그루지야등이 연방에서 떨어져 나갔거나 떨어져나갈 것이 확실시된다.국경들에는 새로이 출입국관리사무소와 세관이 자리잡기 시작하고 있다.경제공동체의 구성등으로 여전히 15개 공화국간에 비자없는 통행이 가능하겠지만 어쨌거나 다른 공화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같은 나라 아닌 다른 나라가 된것이다.스탈린의 러시아화정책으로 지금껏 러시아어를 공용으로 쓰고 있던 이들 독립공화국들에서 점차 고유의 언어를 공용으로 쓸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이에따라 공화국간의 보이지 않는 문화·언어·종족적 장벽은 높아갈 것임에 틀림없다. 25세로 동갑인 스타스와 알레그는 모두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모스크바 외교관 양성대학인 국제관계대학을 나란히 졸업했다.
이들 두사람에게,같은 길을 걸어왔던 두 동창생에게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서고 있다.전공언어로 영어를 택했던 순수 우크라이나 사람인 알레그는 지금 일하고 있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다.『우크라이나는 젊은 인재를 필요로하고 있고 내가 더이상 러시아공화국 주민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한국어를 전공언어로 택했고,유태인의 핏줄인 스타스의 입장은 그렇지 못하다.『내가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더라도 알레그와 같은 역할을 할수는 없을 것이다.그럴바에야 모스크바,잡다한 종족이 섞여사는 이 도시가 오히려 내게는 더 유리할 수도 있다.우크라이나의 독립으로 고향을 잃어버린 일만 생겼다』
잘 알다시피 공포의 철권으로 15개공화국 모두를 단시일내에 러시아화시켰던 스탈린은 그루지야출신이었다.혁명의 아버지 레닌도 순수러시아인이 아닌 동양계의 핏줄이 섞였었다.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기전 소련사람들에겐 어떤 출신이었는가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다.주요한 요직을 대부분 러시아계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소수민족출신 엘리트가 출세하는데 종족의 벽은 그다지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러시아화 정책으로,또 중앙에서 출세하고자하는 엘리트들의 본능적이다시피한 상경으로 전체 소련방의 20∼30%가 다른 공화국 출신들로 채워져 있는 상태다.소수민족들은 법률적 보호를 받을 것이 확실하다.그러나 민족문제는 단순히 법률적인 평등보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데에 있다.소수민족은 무시당하게 돼있고 사회적 차별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에스토니아의 탈린 출신으로 소련 외무성에서 정착,국장급에 오른 우르마스씨(47)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지금껏 에스토니아 출신이라해서 정신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부담을 느꼈던 적이 없다.나는 그저 열심히 일만하면 됐고 내능력에 따라 자리를 배정 받았다.그러나 연방이 해체된 지금 나는 소수민족출신으로서의 한계를 스스로 설정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연방정부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고 곧 이들기구와 건물들은 러시아공화국정부로 귀속될 것이다.러시아공화국 외무성은 이미 예전의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물로 옮겼고 연방정부의 인재들로 공화국 외무성을 확대,발전시켜 나갈 계획을 서두르고 있다.우르마스씨가 러시아공화국 외무성에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그는 역시 러시아민족이 주체인 기구에 참여하는 소수민족일 뿐이다.
『내가 젊다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그러나 생활의 터전이 모스크바에 있고 에스토니아정부도 나를 필요로 하겠지만 그들이 내게 보내는 눈길은 좋지 않을 것이다.내가 돌아가더라도 연방정부에 협력했던 사람이상의 대접을 받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연방의 붕괴와 함께 각공화국에 산재해 있는 소수민족의 서러움이 시작되고 있다.<글=김영만특파원·사진=박영군특파원>
1991-09-20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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