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워츠코프사령관의 승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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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1-03-01 00:00
입력 1991-03-01 00:00
◎다국군,「성동격서」 전술로 이라크 허 찔렀다/상륙 위장 「수비대」 주력군 발 묶어/주요 방어선 우회… 포위공격 성공/미 제공권장악… 기동력도 「황새와 뱁새」격

다국적군이 지상전개시 약 1백시간만에 세계4위의 군사강국으로 간주되던 이라크군에 전격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기만 전술의 성공과 기동력의 우위,첨단과학장비의 도움에 따른 전투수행기술위 발달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데 따른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만전술의 성공때문이었다고 슈워츠코프 다국적군 총사령관은 밝혔다.

지상전발발 4일만에 처음으로 27일 다국적군의 전략을 전황지도까지 곁들여 상세하게 브리핑한 슈워츠코프사령관은 수적인 면에서 이라크군에 절대적인 열세(탱크의 경우 약 3대2,병력은 2대1)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상쇄할 수단으로 기만전술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다국적군이 취한 기만전술은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국적군의 지상공세가 미해병의 상륙작전으로부터 시작해 쿠웨이트시를 목표로 한 쿠웨이트 서부해안지대에 다국적군의 주력부대가 투입될 것이라고 이라크군이 믿도록 만드는데 주력하는 것이었다.

다국적군은 이를위해 지상전개시 불과 수일전까지만 해도 다국적군의 주력부대를 사우디·쿠웨이트 국경의 동부지역에 배치하는 한편 걸프해역에서 미해병대가 반복되는 상륙작전 훈련을 계속함으로써 이라크군 대부분을 쿠웨이트 서부 해안지대에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성동격서의 전법으로 다국적군은 이미 이라크군이 철저한 방어준비를 갖추고 있는 사우디·쿠웨이트 국경지대가 아니라 이보다 훨씬 서쪽의 사우디·이라크 국경을 넘어 이라크영내 깊숙이 진격,이라크군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전략을 세우놓고 있었다.

이같은 기만전술은 보기좋게 적중했다. 다국적군 선봉부대는 이라크군 주력부대가 쿠웨이트서부 해안지대에만 온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 틈을 타 이라크군이 많은 준비를 갖추고 있던 주방어선을 서쪽으로 우회,지상전 개시 하루만에 바그다드를 불과 2백40여㎞ 앞둔 지점까지 거의 무방비상태로 진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다국적군의 기만전술이 성공을 거둘수 있었던 것은 전쟁초기 이라크군의 공군력이 거의 궤멸일보전까지 달한데다 다국적군의 계속되는 공습으로 이라크군의 첩보능력이 마비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이라크군은 지상전개시 수일을 앞두고 다국적군이 서쪽으로 대규모 이동을 하는데도 이를 제때에 파악할수 없었고,또 기동력면에서도 다국적군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설사 이를 알았다 하더라도 적절한 대응을 취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슈워츠코프사령관은 말했다.

그는 또 다국적군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이라크군이 싸울 의사가 없었던데 크게 힘입은 것이라고 말했다. 슈춰츠코프는 공화국수비대를 제외한 나머지 이라크군중 대댜수가 쿠웨이트진격 자체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6개월이상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고생을 한데다,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즉결처형권을 부여한 심복들을 최전선에 배치한데 따른 불만으로 사기가 극도로 떨어져 전투의사가 없었으며 다국적군이 진격해 들어가자 별 저항없이 투항했다고 밝혔다.

한편 지상전 전개 과정에서 각 부대들에 주어진 임무에 대해 슈워츠코프는 ▲걸프해역에 배치된 미해병대는 이라크군 주력부대가 해안지대에서 이동하지 못하도록 묶어 놓은 것 ▲사우디·쿠웨이트 연합군과 미해병 1·2사단은 쿠웨이트 동부해안을 따라 북진 ▲이집트 및 아랍연합군은 쿠웨이트 서부국경을 돌파한후 동쪽으로 진로를 바꿔 이라크군을 포위하며 쿠웨이트시로 진격 ▲미 제1기갑사단은 사우디·쿠웨이트·이라크 3개 국경이 접하는 지역에서 다국적군의 주공격로가 이 지역이라고 이라크군이 믿게 만드는 것 ▲미 82공정사단과 프랑스군은 살만시까지 진격,이라크군 공화국수배대와 맞붙을 미영군의 측면보호 ▲제24 기계화사단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까지 진격,이라크군의 퇴로차단 ▲미 7군단,18군단 및 영 제1기갑사단은 이라크·쿠웨이트 국경지대에 배치된 공화국수비대 격멸 등이었다고 밝혔다.

결국 걸프전쟁을 장기소모전으로 끌고 가겠다는 후세인의 전략은 미국의 기만전술에 걸려 빛을 발하지 못한 셈이며 이로 인해 지상전이 불과 5일만이라는 초단기간내에 끝날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수있다.<유세진기자>
1991-03-01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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