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 조선족 힘이 솟습니다”/노대통령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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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0-12-14 00:00
입력 1990-12-14 00:00
엄 빅토르 박사는 소련연방 최대의 농업대학인 타슈켄트 농대 총장으로 지난달 24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청으로 한국에 와 경남대·효성여대·부산대 등에서 세미나 및 강연회를 갖고 7일 출국했다. 타슈켄트 농대는 학생수 2만,교수 1천명 규모의 대학으로 엄 박사는 소련내 유일한 조선족 국립대학 총장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방소를 계기로 소련인의 시각을 조선족인 그의 기고를 통해 살펴본다.
노태우 한국 대통령의 소련방문 소식을 접하는 순간 가슴이 복바쳐오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기구한 역사를 안고 소수민족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온 소련 거주 50만 조선족이 한결같이 갖는 느낌일 것이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낯설고 막연하고 아주 멀게만 생각됐던 한국이 이제는 지척이 되었고 왕래가 많아질수록 우리 조선족의 뿌리가 바로 한국임을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이어서 한국 대통령의 소련방문은 조선족으로서는 가슴이메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같은 감상적인 생각에만 젖어있을 수 없는 것은 우리는 조선족에 앞서 소련인이라는 현실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대통령의 소련방문을 우리는 소련인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바른 자세일 것이다.
소련이 한국과 가까이하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는 불과 20여 년 전까지도 못살고 후진국이었던 한국이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일에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 점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모든 국가와 가깝게 지낼 것을 주장하면서도 특히 한국을 다른 나라들보다 특별취급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두 번째는 한국은 소련의 좋은 교역상대가 된다는 점이다. 한국은 높은 산업성장을 이루고 있으나 자원이 없고 소련은 자원은 많으나 산업이 낙후돼 있어 양국은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소련내 1백25개 민족 중 29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조선족의 모국과 문화교류 등 다양한 형태의 교류에 대한 필요성 때문이다.
네 번째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낙후된 원동(연해주)지방의 개발에 한국을 적극 참여시킴으로써 원동의 발전과 동북아에서의 국제적 위상 고조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련측의 의도는 빠른 시일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여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양국 정상회담이 열렸고 이어서 한국 대통령의 이번 소련방문으로 경제원조 문제 등 구체적 결실이 맺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국은 아직도 새로 만나기 시작한 지 2년여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실질적이고 유익한 교류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더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양국의 교류라는 것을 가만히 보면 그저 서로 다니면서 만나서 인사나 나누고 술이나 먹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교류란 이런 식의 그저 다니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좀더 가까워지려는 실질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고 그 바탕 위에서 서로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교류」의 의의는 바로 「문제해결」에 있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은 세계평화에 큰 기여를 하는 등 국제적으로는 모든 문제가 잘 풀리고 있다. 동구의 자유와 동서독의 통일,그리고 나 역시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모국에 이렇게 올 수 있는 일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오히려 모든 문제가 더욱 복잡해져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모두 마찬가지다. 각 공화국들이 연방에 대해 독립을 꾀하고 있는 정치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문제도 땅 위에나 땅 밑에나 많은 재산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일할 의욕을 잃고 있어 어렵기 짝이 없다.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하여 이같은 어려운 문제들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솔직한 표현이다.
그러나 더욱 솔직히 말한다면 우리 조선족의 입장에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핏줄을 나눈 사람들로서 소련이 한국과 친선관계를 맺는다 할 때 가장 큰 관심을 갖는 소련인은 조선족이 아닐 수 없다. 1백20여 년 전 고향을 떠나 원동에 온 이래 땀흘려 일궈놓은 생활터전을 빼앗기고 중앙아시아로 집단이주해와 갖은 핍박을 겪으면서도 오늘날 소수민족 중 우수하고 근면한 민족으로 꼽히고 있는 조선족은 다소 들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에 조선족들은 어린아이를 나서 귀가 뚫리면서부터 자본주의는 나쁘고 사회주의는 좋고 북조선이 좋다고 들어왔다. 그러나 요즈음은 사정이 달라졌다. 조선족내에서도 아무도 어느 체제가 좋은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다만 좋은 음식 먹고 잘 입고 잘살고 아이들 학교 잘 다니고 싸움없이 살게 하는 주의가 최상의 주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한국에서 많은 사람이 오고 조선족도 서울방문이 많아지고 있다. 또 북조선에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으며 평양을 찾는 사람도 더 많아졌다.
현재 조선족의 최대문제는 최근 소련내 고조돼가는 민족문제이다. 자치공화국이 없는 조선족으로서는 각 공화국의 민족차별정책으로 점점 더 불이익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선족들은 부지런하고 교육열이 높아 다른 민족보다 비교적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모국을 떠나 살았기 때문에 조선말이 서툴고 이는 젊은 세대로 갈수록 심하다. 이같은 언어문제는 민족을 단결시키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되기 때문에 한국 대통령의 소련방문을 계기로 우리 조선족이 가장 바라는 것은 조선어교육을 위한 책과 선생의 문제가 해결됐으면 하는 것이다.
또 조선의 극과 노래를 할 수 있는 조선족공연단에 대한 지원문제도 있다. 이같은 문제들은 자치공화국이 없는 우리의 입장에서 연방정부든 공화국정부든 어디에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대통령의 소련방문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포함,양국간의 모든 문제들이 빠짐없이 다뤄지고 앞으로도 양국이 함께 노력하는 자세로 서로 협력을 이뤄나가길 기대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국이 명심해야 할 것은 소련은 크고 그 방대한 국가를 이뤄나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저력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겠다는 것이다.
□엄 빅토르<타슈켄트 농대 총장>
△1931년 원동(연해주) 출생
△레닌그라드 사라토프대학 졸업(농업경제학 박사)△1986년∼현재 타슈켄트 농대 총장
1990-12-14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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