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옥살이 죄수” 무죄로 판명(세계의 사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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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0-03-26 00:00
입력 1990-03-26 00:00
경찰이 국민들로부터 크게 믿음을 얻고 있는 나라,일찍이 인신보호장정 등을 마련해 인권보호에 앞장서 온 나라 영국에서 15년전의 한 오심때문에 검ㆍ경은 물론 불문헌법구조에 이르기까지 인권보호를 위해 사법체제가 대폭 개정돼야 한다는 거센 비판이 일고 있다.
1974년 10월 런던에서 일어난 아일랜드공화군(IRA)폭탄테러사건의 범인으로 수감된 4명이 경찰의 거짓말과 증거조작 그리고 검찰의 조작지시로 15년간이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것으로 밝혀져 지난해 10월 석방됐다. 사건과 관련돼 수감중인 또 다른 7명 가운데 1명은 이미 옥사했고 아직도 6명은 항소심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1974년 10월5일. 런던 남서부의 길포드의 한 술집에서 폭탄이 폭발,5명이 즉사하고 50여명이 중화상을 입는 참극이 벌어졌다. 뒤에 밝혀졌지만 이 사건은 IRA와 직접 관련이 없는 북아일랜드 「행동조직(ASU)」이 영국본토에서일으키기로 작정한 폭탄테러의 시작이었다. 충격적인 사건에 여론은 비등했고 테러수사경험이 거의 없는 관할 서레이경찰서는 허둥지둥 수사에 나섰다. 4천여회의 진술,6천명 면접수사의 기록을 세웠으나 당시 술집내에서 데이트중인 남녀 2명의 신원은 밝혀내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1월 다시 버밍검에서 폭탄테러가 발생,21명이 죽고 1백62명이 부상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터졌다.
경찰에 대한 여론의 압력은 가중됐다. 서레이경찰은 용의자 가운데 하나인 폴 힐을 11월28일 런던시내 아일랜드인 거주지역에서 체포했다. 그의 집을 수색했으나 폭탄등 증거물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1주일 사이에 그는 차례로 「공범」 3명이 있다는 것을 「자백」했다.
3명은 그의 친구 제라드 콘론과 패트릭 암스트롱 그리고 암스트롱(24)의 여자 친구 캐롤 리처드슨(17)이었다. 콘론은 30일 북아일랜드에서 체포돼 런던으로 압송됐고 암스트롱과 캐롤은 런던에서 검거됐다. 암스트롱과 캐롤은 길포드사건 당시 데이트중인 남녀로 점찍혔다. 힐은 이미 「폭탄제조자」를 불었다. 그들은 콘론의 아버지 주세페와 미성년자인 조카 2명을 포함한 7명이었다.
이 과정에서 힐과 콘론 그리고 암스트롱은 경찰로부터 구타ㆍ살해위협ㆍ기합ㆍ오물먹이기ㆍ가족살해협박을 차례로 받아 경찰의 각본대로 「자백」했다.
경찰은 「자백」이 유일한 증거인 만큼 고문사실을 즉각 부인했다. 그들 4명과 7명은 75년 차례로 재판에 회부돼 무기징역 등의 중형이 선고됐다.
하지만 폭탄테러는 계속 일어났다. 그리고 증거가 누적되면서 마침내 75년말에는 ASU멤버가 거의 체포됐다. 이들은 법정에서 길포드사건 등의 진범임을 주장하면서 재판을 거부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길포드 4명을 구하려는 「교묘한 술책」으로 간주,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일련의 폭탄테러가 동일범소행이라는 폭탄전문가의 진술은 검찰지시에 의해 경찰기록에서 누락됐고 진범들의 진술은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묵살됐다.
77년 길포드사건 관련자들은 뒤늦게 ASU멤버들의 진술을 증거로 항소했지만 기각됐다.
세월은 흘렀다. 1980년 1월. 폭탄테러로 인해감정적 반응을 보이던 여론도 잠잠해 졌다. 이때 오래전부터 결핵으로 거의 활동을 못하던 콘론의 아버지 주세페가 병사했다. 그는 임종시 아들 콘론을 보자 산소호흡기를 떼내고는 『나는 무죄』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당시 병상을 둘러싼 경찰ㆍ교도관 등 어느 누구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주세페가 결핵으로 도저히 테러활동을 할 수 없었다고 확신하고 무죄증명작업을 벌이던 아일랜드카톨릭교회의 사라수녀는 무죄확신을 더욱 굳혔다.
사라수녀의 활동으로 영국의원들이 재조사를 촉구했다. 85년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서기장도 대처총리와의 회담에서 이 문제를 거론했다. 87년 영국 내무성은 마침내 재조사를 시작했고 89년 그들의 자백기록이 경찰각본의 사본으로서 자백이 유일한 증거인 사건에서 자백이 위조됐음이 드러났다. 이어서 폭탄전문가의견 조작,피고인측 반증의 일방적 묵살 사실도 드러났다. 89년 10월19일 비상항소심에서 「길포드의 4인」의 석방이 결정됐다. 영국정부는 힐에게 1만5천달러,나머지 3명에게는 7만5천달러를 배상했다. 아직도 「폭탄제조자」 6명은 석방을 고대하고 있지만 항소심은 열리지 않고 있다.
「여론재판」「무리한 수사」「엉터리 재판」이 남긴 충격은 크다. 크리스 물린 노동당의원은 『경찰은 75년 진범을 체포했을 때 이미 그들이 무죄임을 알았다』며 『잘못을 끝까지 덮기 위해 영국 사법절차의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모조리 왜곡됐다』고 개탄했다. 또 이 사건을 계기로 묵비권 보장등 개인인권의 명시적 보장을 위해 불문헌법체계의 수정과 공정한 재판을 위한 독립된 항소재판소 설치등 사법개혁이 필요하다는 여론도 조용히 제기되고 있다.<강석진기자>
1990-03-26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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