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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마음 돌린 ‘정탁의 상소’… 명량대첩 승리 만들고 조선을 구하다[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수정: 2023.10.29 23:40

<33>상소로 이순신 구한 정탁

광해군 전시 상황 임면권 소극적
정탁이 나서 독자적 인사권 주청
관원 선 임명 후 보고 체계 만들어

선조, 명령 어긴 이순신 서울 압송
정탁, 1298자로 선조 심경 헤아려
이순신 죄 고하며 임금의 ‘인’ 강조
“전쟁서 공 세워 잘못 바로잡아야”

선조는 왜란이 발발하고 마지막 희망으로 삼았던 신립의 중앙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무참히 패하자 황망히 한양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난공불락으로 여겼던 평양성마저 다시 내주자 선조는 요동 망명의 뜻을 굳히게 된다. 결국 광해군을 황급히 세자로 삼고 종묘사직을 받들어 나라를 지키도록 했다. 행재소(行在所)와 더불어 별도 조정인 분조(分朝)를 가동한 것이다. 영의정 최흥원을 비롯해 10명 남짓한 중신이 분조에 배속됐는데, 좌찬성 정탁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분조는 사실상 이후의 전쟁 수행을 주도하다시피 했다. 분조의 실상을 오늘날에도 가감없이 살필 수 있는 것은 정탁이 남긴 ‘피난행록’(避難行錄) 덕분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후세에 뚜렷이 각인된 이유는 따로 있다. 충무공 이순신이 처형 위기에서 벗어나 명량대첩으로 전세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정탁이 상소로 선조를 설득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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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예천군 예천읍 한천변에 조성된 정탁 조형물. 이순신 장군의 구명을 청한 상소문, 이른바 신구차(伸救箚)를 형상화했다.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이 세상을 떠난 뒤 실록에 실린 졸기(卒記)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각각 전한다. 선조실록 본문은 ‘서원부원군 정탁이 죽었다’는 한 줄이다. 그런데 사관(史官)의 평가가 제법 길다. ‘탁은 인품이 유순하고 온후한 사람인데, 등과했을 당시 명망이 없어 오랫동안 교서관에 머물러 있었다. 일찍이 향실(香室)에서 숙직하던 날 문정왕후가 불공을 드리려 하자 불가한 일이라고 고집하면서 끝내 향을 올리지 않았다.’

사관은 정탁이 ‘이 사건 때문에 당세(當世)에 중시되고 현로(顯路)가 열리게 됐고 결국 재상에 발탁됐다’고 했다. 명종의 어머니로 수렴청정을 하며 권세을 휘둘렀던 문정왕후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대비를 상대로 유교국가의 정통성을 지켜 세상에서 인정받고 벼슬길도 열렸다는 뜻이다. ‘나이 들어서는 벼슬에서 물러가기를 청했으니 옛사람의 기풍이 있었다. 자리를 탐하여 늙어도 물러가지 않는 자에 비하면 차이가 크다’고 했으니 최상급 추도사다.

그런데 수정실록은 다르다. ‘정탁이 죽었다. 정탁은 예천 사람으로 류성룡과 친해 재상이 되었으나 언제나 우유부단했다. 성룡이 조정에서 떠나자 탁도 해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때에 이르러 집에서 병으로 죽었다.’

광해군 시대 북인이 중심이 돼 서술한 선조실록을 인조반정 이후 서인 시각에서 고친 것이 선조수정실록이다. 약포는 젊은 시절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하에 모두 출입했다. 남명과 퇴계는 각각 북인과 남인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다. 졸기의 평가가 바뀐 이유도 정치적 상황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피난행록’을 읽어나가다 보면 약포가 선조수정실록의 서술보다는 선조실록의 평가에 더 근접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1592년 6월 8일 대동강변에 왜적이 나타나자 선조는 영변으로 가겠다고 고집한다. 평양부민들은 떠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정탁은 10일 이렇게 주청했다. ‘서울을 지키지 못한 것은 돌이킬 수 없다. 다행히 평양은 성곽이 완비되어 있고 식량도 아직은 버틸 만한 데다 패수(浿水·대동강)는 중국의 장강(長江) 같은 천혜의 참호다. 평양을 버리면 큰일을 그르친다. 엎드려 성상(聖上)의 명철한 결단을 바라오니 반드시 대가(大駕)의 행차를 멈추어야 한다’고 했다. 누가 봐도 줄을 잘 서 출세하는 부류의 언동은 아니다. 정탁의 절절한 호소에도 선조는 ‘적의 예봉은 피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선조가 광해군에게 분조를 꾸려 강계로 가도록 명한 것은 영변에서 의주로 출발하기 직전인 6월 14일이다. 분조는 최흥원과 정탁, 형조판서 이헌국, 부제학 심충겸, 형조참판 윤자신, 호조참판 류자신, 병조참의 정사의, 승지 류희림, 익위 류조인 등의 면면이었다. 이후 순변사 이일이 합류하는 등 8월이 되면 분조는 당상관 13인에 당하관 30인에 이르는 체제를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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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정서원 내부. 1640년 창건한 서원 내부에 약포 정탁과 셋째아들 정윤목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평안도 북동쪽 내륙의 강계는 4개의 하천이 합류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그런데 나이 든 대신으로 이루어진 분조는 발걸음이 느렸고 이미 주변 지역에서 왜적이 출몰하고 있었다. 강계를 거쳐 함흥으로 간다는 구상은 실현되기 어려웠다. 함경도는 머지않아 가토 기요마사의 왜적 2군이 휩쓸게 된다.

정탁은 분조의 사정을 이렇게 적어 의주 행재소의 선조에게 올렸다. ‘동궁의 행차를 모시는 인원은 그 수가 본디 적었는데, 늙고 병든 사람이 다수를 차지해 낙오자가 있었던 데다 골짜기와 고개를 치달리느라 마부와 말이 몹시 지쳤습니다. 험한 길에 자빠지고 엎어지며 지금 이천(伊川)에서 관동의 온당한 곳으로 가고자 하나, 적은 이미 철원을 경유해 김화 등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분조는 운산, 개평원, 희천, 영원, 양덕현, 곡산, 이천, 문암, 곡산, 성천, 자산, 순천, 숙천, 안주, 영유, 증산, 함종, 용강, 영유, 영변, 정주 등 안전한 곳을 찾아 불과 며칠 단위로 옮겨다녀야 했다. 장동역에서 설한령으로 가는 6월 19일자에는 이렇게 적었다. ‘왕세자(광해군)는 고개 아래 민가에서 묵었고 신료들은 모두 노숙했는데, 저녁에 가랑비가 내렸다.’

분조의 과제는 전쟁 수행과 민심 수습이었다. 정탁은 분조가 주어진 역할을 성공적으로 이뤄 내려면 독자적 인사권 행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부왕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광해군은 하지만 임면권 행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정탁은 전시 상황인 만큼 분조가 먼저 관원을 임시로 임명하고 행재소에 보고하겠다고 선조에게 주청한다. 이후 전국에서 올라오는 관리의 장계 등 각종 보고서는 분조가 먼저 열람하고 국왕에게 보내게 된다.

8월 10일자에는 행재소에 보낸 장계가 보인다. ‘나라의 형세가 아슬아슬 위급한 때를 당해 고을의 수령 자리가 빈 곳을 임명해 채우는 것이 하루가 급한 만큼 그 가운데서 가장 급한 여러 곳을 임시로 임명했습니다. 심지어 중첩되게 임명했으니 지극히 황공하옵니다’라는 내용이다. 관리 임명권이 행재소와 분조 두 군데로 나눠져 있다 보니 때로는 서로 다른 인사발령도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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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탁 무덤.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분조는 1000명 남짓한 군졸로 자체적 군사력도 확보했다. 정탁은 의병에도 눈을 돌린다. 실제로 분조가 거쳐 가는 지역에서는 의병이 다투어 봉기했다. 정탁은 12월 의병을 활용해 도성을 수복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경기도에는 의병조직인 의려(義旅)가 40개 남짓이나 있으니 명망 있는 인물을 도순찰사로 관군과 의병을 통합해 이끌게 하면 승산이 있나이다’라고 했다.

첫 번째 분조는 1592년 6월 14일부터 이듬해 1월 20일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평양성 수복 전투에서 승리하고 왜군을 추격하던 명나라 군사는 벽제관에서 대패하자 강화협상에 나서게 된다. 명군은 조선에 세자로 하여금 직접 하삼도 방비에 나서게 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하는데 그 결과 다시 분조가 성립된다. 정탁은 1593년 11월 19일부터 이듬해 8월 25일까지 2차 분조에도 참여한다. 2차 분조는 전라도 전주와 충청도 공주·홍주(홍성)를 오갔다.

시간이 흘러 1597년 2월 1일 선조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하옥시키라 명한다. 조선과 왜를 오간 이중첩자 요시라(要時羅)가 가토 기요마사의 움직임을 미리 알려 주었는데도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두어 기다릴 것’이라며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앞서 12월에는 도체찰사 이원익이 주도해 부산포 왜군진을 공격하고 화약고를 불태우는 쾌거가 있었다. 그런데 통제영 군관들이 자신들의 공로인 양 보고했는데 이순신이 그대로 장계를 올린 것도 빌미가 됐다. 1597년 2월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체포된 이순신은 3월 4일 서울로 압송됐다. 선조는 승정원에 비망기를 내려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으니 이순신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1298자로 이루어진 정탁의 상소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순신은 큰 죄를 지었으나 성상께서는 얼른 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두둔하여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야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다만 감옥 일을 다스리는 체모와 순서만으로 그러심이 아니라 인(仁)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 기어이 그 진상을 밝힘으로써 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서 하심이라, 성상의 생명을 중시하는 마음이 자못 죄를 짓고 죽을 자리에 놓인 자에게까지 미치시므로 신은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언뜻 이해가 어려울 만큼 복잡한 수사(修辭)가 인상적이다. 다음에 나오는 본론은 ‘왜적이 이순신을 무서워하고 있으니 임금께서 너그럽게 용서해 전장에서 공을 세우는 것으로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다. 선조의 복잡한 심경을 헤아리다 보니 완곡하기 이를 데 없는 상소가 됐을 것이다.

정탁은 예천 출신으로 1558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도승지, 대사성, 강원도관찰사, 대사헌, 예조·형조·이조 판서,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했다. 호종공신 3등에 녹훈됐고 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글·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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