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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비 오는 날/이동순

수정: 2021.06.1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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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동순

비 오는 날

이층 창문에서 손풍금 소리가 들린다

악사는 늙었고

구부정한 어깨에 걸린 악기도 낡았다

비는 악사의 추억 속으로

소리 없이 내린다

눈을 지그시 감고 회상에 잠겨 있는

악사의 가슴에서

그의 지치고 고단했던 과거 시간이 모두 걸어 나와

악기 속으로 황급히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흘러간 날

가수 백련설의 전속 반주를 맡고

북만주 치치하얼까지 가서 그곳 동포를 울렸다는

늙은 악사가 켜는 손풍금

비는 오는데

그의 구슬픈 반주에 맞춰 ‘나그네 설움’을 부르고

‘번지 없는 주막’까지 기어이

찾아서 간다

두 벽이 창문인 적산가옥의 3층에서 7년을 살았다. 1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사이 나무 계단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좋아 3층에서 다시 1층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창밖으로 사철 무등산이 보였다. 시위대의 함성과 페퍼포그 터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가난한 화가 다섯과 시인 한 명이 적산가옥에 모여 살았다. 모든 날이 좋았지만 비 오는 날이 제일 좋았다. 시인 소설가 화가 문화부 기자들이 모여들어 막걸리를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비 오는 날은 옛 생각이 난다. 마음 안의 들판이 촉촉해지고 바라보는 모든 곳에서 손풍금 소리가 난다.

곽재구 시인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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