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모두가 안전해지기 전까지는/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업데이트 2021-05-19 03:01
입력 2021-05-18 17:24
이미지 확대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원본 이미지입니다.
손가락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확대해 보세요.
닫기
지난해 말 영국에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됐을 때 한국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과 현지 상황을 전하는 짧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백신에 대한 영국인들의 반응은 어떠냐(대답: 세계 최초로 백신을 맞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백신 안 맞겠다는 사람은 없냐(대답: 주변에서는 아직 못 봤다) 등의 문답이 오고 가다가 한국인들을 포함해 영국에 있는 외국인들에 대해 백신과 관련한 차별이 있지는 않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즉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백신 순서가 늦어지거나 접종에서 배제된다거나 하는 일이 있을 것 같으냐는 질문이었을 것인데, 오히려 그 질문을 듣고 좀 놀랐다. 그런 식으로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해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될 것이고, 다만 문제는 NHS(National Health Serviceㆍ영국의 국가 보건 서비스를 총괄하는 시스템)에 등록이 돼 있느냐 여부일 거라는 대답을 했다.

NHS 등록 여부는 불법체류자 문제와 관련이 있다. 영국의 경우 유럽에서 독일 다음으로 불법체류자가 많다고 한다. 영국 정부가 2005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불법체류자 수는 43만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혹자는 100만명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대개 위험도가 높은 노동에 종사하고, 보다 열악한 주거 환경에 노출돼 있지만 NHS에 등록이 돼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GP(담당 가정의ㆍ영국에서는 거주지 근처의 GP에 등록해 일차 진료를 받아야 한다)에 등록할 때 신분증과 거주지를 증명할 서류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서류를 구비하기 어렵거나 제출을 꺼리기 때문이다. 백신 접종 역시 대개 GP를 통해 절차가 진행되므로 NHS에 등록된 사람만을 대상으로 백신을 맞도록 한다면 불법체류자는 접종을 받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 영국 당국은 지난 2월 백신 접종은 인권과 관련한 사안이라면서 영국에 살고 있는 모든 외국인은 적법한 비자를 갖췄는지 여부를 불문하고 영국인과 동일한 조건으로 백신을 접종받을 수 있고, 이 과정에서 불법체류자인지 여부를 추적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즉 증빙 서류가 전혀 없이도 백신 접종을 신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영국 당국의 조치는 방역을 우선 목표로 해서 내린 것이다. 바이러스가 국적이나 합법적 체류자인지 여부를 따져 인체에 침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가리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더 많이 백신을 접종하도록 해야 사회가 집단면역 상태에 도달한다. 그러니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백신을 접종하지 않거나, 순위를 뒤로 미루거나, 비용을 지급하라고 하거나, 합법적으로 체류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가장 중요한 목표, 즉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백신을 맞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저 질문을 받고 보니 한국인들은 스스로 당하는, 혹은 당할 가능성이 있는 차별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됐다. 반면 한국인에 의해 벌어지는 차별에 대해선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심지어 무시하는 경향을 종종 보인다. 즉 본인들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 데 더 익숙한 것인데, 여러 분야에서 국제적 위상을 자랑하는 마당에 이제는 스스로 차별을 행하는 가해자의 위치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지 않나 싶다.

한국의 불법체류자 역시 4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다행히 한국 방역 당국은 지난 4월 초 불법체류자도 불이익을 받을 걱정 없이 백신 접종을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보다 열악한 보건 환경에 처해 있는 이들이 걱정이나 불안 없이 하루의 노동을 쉬고 접종을 받을 수 있게 되도록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조치가 취해지기를 바란다.

전 세계가 코로나로 인해 꼼짝 못 하고 있는 이상한 시절에 주문처럼 반복되는 문구가 있다. ‘모두가 안전해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No one is safe, until we are safe) 선진국들이 백신을 독점하겠다는 태도를 경계하는 말이다. 한국 내에 있는 모두가 안전해지기 전까지는 한국인들 역시 안전하지 않다.
2021-05-19 26면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

120년 역사의 서울신문 회원이 되시겠어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