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성폭행 아동 두번 울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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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3-11-06 00:00
입력 2003-11-06 00:00
이렇게 정신적 고통이 심한 상태에서 피해 아동과 부모들은 또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된다.피의자를 신고하게 되면 경찰과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몹시 당황한다.특히 아동이 6세 미만이거나 정신적 문제가 심각한 경우 초기에 성폭행 사실을 6하원칙에 입각하여 논리적으로 진술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논리적이고 일관적인 진술이 제대로 될 때까지 반복 질문하게 되고 낯설고 딱딱한 분위기의 경찰서는 아동을 잔뜩 주눅들게 한다.이렇게 진술을 하고 온 날 밤에는밤새 소리를 지르고 흐느끼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부모들은 고소를 포기하거나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며 피의자에게 직접 보복을 생각하기도 한다.다행히 최근 경찰에서 성폭행 피해 아동의 비디오 진술 장면을 녹화하여 증거자료로 사용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재판과정에서도 많은 어려움이 있다.아동이 직접 법원에서 다시 진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크나큰 걸림돌이다.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어린 아동의 경우 기억을 제대로 못할 수 있고 예전의 나쁜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아동의 입장에서는 백해무익하기 때문이다.
최근 아동이 법정에서 진술을 하지 않았다고 피고인에게 무죄가 선고된 사건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물론 피의자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하고 법적인 절차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되면 어린이 성폭행 사건의 경우 법적인 보호는 아예 불가능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또한 피해 아동을 진료한 의사가 법정에 나가 증언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의사들이 성폭행 피해 아동의 진료를 반기지 않게 되어 치료를 받는 것조차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아동 성폭행범들은 이들이 진술을 제대로 못하고 고소와 재판 과정에서도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상습적으로 하게 된다.따라서 어린이 성폭행 범죄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길은 성폭행범을 빠른 시일 내에 확실히 검거하여 처벌하는 것이다.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제도는 성폭행범에게 지나치게 유리하게 되어있어 어린 딸을 둔 많은 부모들이 안심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동안 사회가 많이 변해왔으나 사법제도의 틀과 내용은 이를 따르지 못해 생긴 결과일 것이다.
필자는 수년간 성폭행 피해 아동과 부모를 치료하고 또한 수사 과정과 재판과정에도 일부 참여하면서 우리 사회가 많이 변해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6년 전 처음 성폭행 피해 아동을 맡을 때보다 부모들의 의식 수준이 향상되어 정신과 치료에 대한 저항도 줄어들고 수사과정에서도 피해 아동을 배려하는 점이 향상되고 있다.
하지만 어린이 성폭행 사건은 진술을 얻는 과정부터가 아동의 심리적 상태와 정신적 문제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전문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나 아직 전문가들을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에서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예를 들어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시체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전문의사에게 의뢰하여 그 결과를 근거로 수사를 하듯이,어린이 성폭행 사건 역시 객관적 평가와 증거를 바탕으로 수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외국의 경우 아동의 진술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정신의학 전문의의 도움으로 객관적인 진술을 하게 하고 그 과정을 모두 녹화하여 중요한 증거로 사용하고 있다.이제 우리 수사 관행과 사법제도에서도 관련 전문가들과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더욱 필요하다.특히 아동과 그 부모에게 평생의 고통을 남기는 어린이 성폭행 사건의 경우 이러한 적극적 노력 없이는 계속 증가할 것임을 우리 모두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신 의 진 연세대의대교수 소아정신과
2003-11-06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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