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北·日 정상회담/ 北·日 ‘굴곡의 57년’/’반보 전진 1보 후퇴’ 반복
수정 2002-09-17 00:00
입력 2002-09-17 00:00
냉전상황에서 줄곧 대북 관계에 소극적이던 일본이 변한 것은 70년대.중·미 공동선언(72년 2월)과 남북 공동성명(72년 7월),일·중 국교정상화(72년 9월)등 긴장완화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그러나 의회 차원의 접촉기류는 75년 일본이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의 교차승인 제안을 환영한 데 대한 북한측 반발로 다시 냉각됐다.
일·북간 관계 진전이 더디게 된 것은 양측 현안과 함께 주변 ‘안보’상황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83년 10월 미얀마 양곤 폭파사건,87년 11월 KAL-858기 폭파사건,92년 북한 핵문제 및 이은혜 사건,98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등이다.이에 따른 경제 제재 등의 조치로 북·일 무역규모는 89년 이후 연간 5억달러 내외에 불과하다.그 나마도 80∼90%가 북한과 재일조선인총연합회간 무역,이른바 ‘조(朝)·조(朝)’무역 형태다.
북·일간 본격적인 수교 교섭 물꼬를 튼 것은 일본 정계 막후 실력자였던 가네마루 신(金丸信·1996년 사망)전 자민당 부총재의 방북.그는 자민·사회당 의원 대표단을 이끌고 방북,“국교정상화를 위한 정부간 교섭을 개시한다.”고 북측과 합의했다.91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첫 수교회담은 92년 11월8차 회담에서 일본측이 “대한항공기 납치범 김현희의 일본어 교사로 알려진 이은혜(李恩惠)가 북한측이 납치한 일본인”이라는 일본측의 의혹제기로 결렬됐다.
95년 대북 쌀 지원(무상 15만t,유상 35만t)을 통해 꾸준히 관계개선 노력을 하면서 일 정부는 96년 대북접촉 창구를 정부로 일원화했고,정치권은 97년 모리 요시로(森喜朗)자민당 총무회장,99년 12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전 총리의 방북을 통해 수교회담을 도왔다.
2000년 4월 7년반 만에 수교교섭 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지만 진전이 없었다.그해 7월26일 방콕에서 사상 첫 외무장관 회담을 가진 뒤 10차,11차 수교교섭회담을 가졌지만 결국 결렬됐다.다시 급진전된것은 지난 7월31일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외상과 백남순(白南淳) 북한외상간 회담.이후 북·일 적십자 회담과 국장급 회담이 이어졌고,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가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과 사상 첫 정상회담을 갖게 됐다.
김수정기자 crystal@
2002-09-17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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