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출토 청자 나한상(한국인의 얼굴:92)
기자
수정 1997-01-18 00:00
입력 1997-01-18 00:00
고려사가 기록한 가장 큰 국란은 1231년 몽골(몽고)의 침략일 것이다.오랫동안 태평을 누렸던 고려는 몽골의 침략으로 나라 전체가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고려왕조는 1232년 부랴부랴 개경을 떠나 도읍을 강화로 옮겼다.강도라는 이름으로 전란중 임시 도읍지가 된 강화는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 왕조정치의 중심축을 이루었다.
그 강도 옛 땅에서는 명품의 청자가 가끔 나왔다.지난 1950년대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에서 나온 청자철퇴화점문나한상이 그 하나다.22.3㎝ 높이의 이 청자나한상은 국보 173호로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팔짱을 낀 나한이 경상에 몸을 기대고 앉아있는 모습이 표현되었다.무게를 온통 머리에 싣고 바윗등을 자리삼아 앉았다.그래서 나한의 머리가 몸뚱이에 비해 무척이나 컸다.
오랜 세월 결가부좌를 튼 고행의 자세로 얻어낸 법력을 머리에 차곡차곡 쟁인 탓일까.머리가 유난히 큰 나한이다.고통스러웠던 수행의 시절을 새겨놓은 골깊은 주름이 이마에 졌다.그렇게 늙어온 나한은 눈을 절반쯤 치깔고 아득히 먼 데를 망연하게 바라보았다.나이가 들어서인지 눈두덩 위쪽이 약간은 꺼졌다.그래서 철채를 칠해놓은 눈썹이 더욱 검게 부풀어 살아있다.
나한의 코는 크고 실했다.콧날이 서 있기는 하나 콧방울께가 꽤나 펑퍼짐하여 얼핏 주먹코처럼 보였다.다문 입이 약간은 합죽하지만,아직 볼에는 살이 붙었다.부처나 다름없이 귀도 큰 나한의 상호는 한마디로 둥글었다.원만한 얼굴이다.
옷깃을 잔뜩 여몄다.옷을 여민채 팔짱을 끼느라 그러지 않아도 머리에 비해 작은 몸집이 더욱 왜소해 보인다.옷주름은 굵게 잡혔는데,주름 가까이에 하얀 반점의 돋을무늬가 콕콕 찍혔다.그 반점은 한 때 고려청자에 유행처럼 따라붙었던 이른바 백퇴화문이다.백토로 점을 찍어 돋을 무늬를 나타낸 퇴화문은 14세기까지 이어졌다.이 청자나한상의 묘한 맛은 철화에서 발견되었다.머리와 얼굴,옷자락에 철화를 군데군데 칠해놓아 청자가 지닌 본래의 태깔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강화에서 출토한 청자나한상 말고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다른 청자인물상이 있다.대구에서 나온 청자도사형주자다.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했다.이 보다 앞선 시기에 청자도사형연적도 전해오는데 역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되어있다.<황규호 기자>
1997-01-18 11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THE NEXT : AI 운명 알고리즘 지금, 당신의 운명을 확인하세요 [운세 확인하기]](https://imgmo.seoul.co.kr/img/n24/banner/ban_ai_fortune.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