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건국 40돌 행사」 찍은 파 영화 큰 충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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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1-06-12 00:00
입력 1991-06-12 00:00
◎「붉은 왕조 신격화」에 세계가 전율/배우는 「주석」·백만 군중은 “박수기계”/광신도 얼굴엔 웃음보다 고뇌가…/미 이어 일서 상영… “인간성 말살의 현장기록”

1시간26분짜리 한 짤막한 기록영화가 지금 미국·일본을 비롯한 자유세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인류사적 관점에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국가」란 무엇인가,「조직」,나아가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이 영화는 처절하게 묻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 필름의 스토리는 없다. 다만 열광하는 듯 보이는 1백만 대군중의 「퍼레이드」만이 있을 뿐이다. 퍼레이드의 진행과정을 통해 한 「위대한 독재자」의 사상과 행동,우상화의 실상을 소개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단 한 사람만을 빼놓고는 모두 박수치고 만세 부르는 기계로 전락된 것처럼 보인다. 대사도 해설자의 내레이션만 없다면 「만세」로 일관한다.

미국에 이어 10일 하오 1시30분과 3시 2차례에 걸쳐 도쿄(동경) 긴자(은좌) 도쿄가스 6층 홀에서 열린 한 영화의 시사회에 참석했던 5백여 명의 관람객들은모두 말문을 잊었다. 직접적인 코멘트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모두 전율을 느낀다는 표정이었으며,지구상에 과연 이런 사회도 존재했었는가라는 자신의 무지에 회의하는 얼굴들이었다. 충격의 영화였다.

제목은 「퍼레이드」,「동구가 본 붉은 왕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감독은 폴란드 태생의 안제이 피디크(Andrzej Fidyk). 37세의 나이답지 않게 생의 근본문제에 관해 문답한다. 그것도 주관을 넣지 않고 사실만을 전달함으로써 인상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는 198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 40주년 기념식전에 정식으로 초대된 폴란드 국영 보르텔사의 취재반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영화는 9·9절 경축전야제 행사로부터 시작됐다. 수만의 군중이 남녀 짝을 지어 춤을 추고 있었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이며 여인들은 후줄근한 치마저고리에 샌들을 신고 있다. 표정은 모두 웃는 얼굴들이었다. 군중들의 표정은 식전의 메인 회장에 김일성 주석이 입장할 때 클로즈업됐다. 자신을 잊고 미친듯이 부르짖는 만세소리와 박수는 10여 분 간이나 계속됐다. 모두 광신도처럼 열광했다.

장면은 다시 평양비행장으로 바뀐다. 경축식에 참석차 내북한 외빈을 맞는 행사장면이 이어졌다. 『자,아프가니스탄반,아프가니스탄반…』하고 부르는 소리에 비행장 한 구석에 주저않아 기다리던 남녀 환영인사는 자기에게 배당된 환영 꽃송이를 찾아들고 일어섰다. 기다리기에 지쳤다는 듯 한 부인은 목을 자기 손으로 툭툭 두들기며 적당히 간격을 맞춰 비행기 앞에 도열했다. 영화장면은 새빨간 운동복과 모자 차림의 매스게임 대열이 뛰어나오는 스타디움과 일사불란한 카드섹션 장면으로 바뀌기도 하며 곳곳에 세워진 김일성 동상,성지가 된 김일성 생가도 비춘다. 금강산 암벽에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청년돌격대에 의해 새겨진 무수한 슬로건,외국 원수로부터 받은 선물을 진열해놓은 박물관도 나온다. 4쪽으로 된 문 한 짝이 4t의 구리로 만들어졌다는 설명을 하며 안내양은 손잡이를 공손히 수건으로 싸서 쥐고 문을 연다. 진지한 표정으로 정교하게 소총을 분해·조립하는여학생들의 모습도 비추었다. 1백만을 넘는 대군중이 밤하늘 밑에 햇불을 켜들고 광장을 메우며 행진을 계속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났다.

이 영화에 대해 일본의 월간지 호세키(보석) 7월호는 『사회주의 최후의 비경을 파헤친 것이며 시공을 초월한 수수께끼국가의 실상을 잡은 것』이라고 평한다. 거대한 개선문,주체사상탑과 유치원·학교에서도 김일성 일가의 얼굴 사진과 생일까지를 기억해야 하는 김일성 부자의 신격화현상에 대해 폭소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고 주간신문(6월13일호)는 쓰고 있다. 『이 영화를 정치영화가 아니라 그런 체제를 만들어낸 인간의 악마성을 포착한 작품으로 보아주었으면 한다』는 것은 이 영화를 배급한 「퍼레이드 키네마」측의 의견이다. 이 기념식전이 펼쳐지고 영화가 제작되던 88년 9월은 전세계의 이목이 서울올림픽에 집중되어 있을 때였다. 북한이 이 식전을 1백만 군중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펼친 것도 세계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영화는 같은 공산권의 영화인에 의해 북한측의 의도대로 제작됐다.그러나 이 영화를 본 자유세계인들의 반응은 제작의도와 정반대였다. 광신도처럼 열광하는 듯 보이는 군중 하나하나의 얼굴을 클로즈업시켰을 때 그 얼굴은 웃음을 띠고 있었으나 인간적 고뇌의 표정이 역력했다.

맹목적인 추종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말살된 인간성만이 나타났다. 인간은 과연 얼마만큼 조직화될 수 있는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공허한 현대의 거대한 이벤트만이 극명하게 묘사되었다. 1백만 대군중이 정권의 도구로서 햇불을 들고 정처없이 흘러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감독과 관중은 번민했다. 유럽에서는 잇따라 무너지고 있는 사회주의의 벽을 계속 높이 쌓아올리고 있는 「빛나는 주체사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외채에 허덕이면서도 「항상 인민을 행복으로 이끄는 위대한 태양」은 과연 누구인가. 어쨌든 이 영화로 안제이 피디크 감독은 89년 한햇동안 라이프치히 국제영화제 그랑프리를 비롯,만하임 국제영화제 금상,국제 TV·라디오 콩쿠르의 이탈리아상 등을 수상하는 세계적 감독으로 클로즈업되었다.<도쿄=강수웅 특파원>
1991-06-12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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