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아무리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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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12-11-06 16:34
입력 2012-11-06 00:00

영화 ‘남영동1985’서 고문당하는 민주화 운동가 연기… 배우 박원상 인터뷰

“고문을 실제 경험한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고문은 당하고 또 당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했는데, 영화를 찍으며 그 말에 공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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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자전 수기 ‘남영동’을 토대로 한 영화 ‘남영동 1985’(감독 정지영)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는 민주화 운동가 김종태 역을 연기한 배우 박원상. 연합뉴스
고(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자전 수기 ‘남영동’을 토대로 한 영화 ‘남영동 1985’(감독 정지영)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는 민주화 운동가 김종태 역을 연기한 배우 박원상.
연합뉴스
영화 ‘남영동1985’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민주화 운동가 ‘김종태’를 연기한 배우 박원상(42)은 영화를 찍으며 그런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고 떠올렸다.

이 영화는 고(故)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22일간의 잔인한 고문 기록을 담고 있다.

영화에서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주인공은 고 김근태 고문처럼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던 사이 영문도 모른 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와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자백을 강요당하며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을 받는다.

이 고문의 기록을 영화화하면서 배우 박원상 역시 비슷한 강도의 고문을 실제로 받아야 했다. 칠성판(고문을 위해 사람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만든 나무판)위에 누워 사지를 결박당하고 얼굴 위에는 거즈가 올려진 채 주전자로 들이붓는 물이 콧구멍 속으로 흘러들어와 숨을 쉴 수가 없는 상태를 1분 가까이 견뎌야 했다.

오는 22일 개봉을 앞두고 6일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촬영 과정에서의 고생담을 생생히 전했다.

”영화 촬영인데도 칠성판에 묶이는 순간 심리가 막막해집니다.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지니까요. 심리적으로 답답하니까 갑자기 콧등이 간지럽다든가 하는 느낌도 있고요. 얼굴에 거즈를 올려놓으니까 다른 배우들 얼굴도 안 보이죠. 그 상태에서 얼굴 위로 물이 쏟아지면 말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버틸 수 있는 만큼 버티다 정 못 버티겠는 순간에 최대한 발버둥치겠다, 그걸 신호로 멈추자’고 약속을 하고 고문을 시작하는데 다른 배우들이 보기에는 제 반응이 연기인지 진짜 죽겠다는 건지 구분을 잘 못해서 처음엔 정말 한계 상황까지 도달한 경우가 많았어요. 그때마다 몸이 회복하는 데 한참 걸리곤 했죠.”

다행히 촬영이 진행될수록 고문하는 배우들이나 당하는 쪽이나 조금씩 적응을 해나갔다고 했다.

”우리가 촬영한 장면들을 모니터링하면서 시간을 재보니 평균적으로 35-40초 정도는 참을 수 있더라고요. 그 정도로 시작해서 점점 초수를 늘려갔죠. 마지막 고춧가루 물고문 장면은 롱테이크가 필요했는데 우리는 나름대로 터득한 요령으로 간신히 찍었지만, 실제 그런 걸 경험한 분들은 도대체 어떻게 버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어렸을 때 강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경험으로 물 공포증을 갖고 있어 초반 촬영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연극을 오래 하면서 호흡과 발성 훈련이 잘돼 있는 편이라 물고문 역시 호흡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첫 촬영에서 얼굴에 물이 뿌려지는 순간 어릴 때 트라우마가 몸을 경직되게 하더라고요. 코에만 물이 안 들어가면 버텨보겠다고 했더니 최대한 입 쪽으로 뿌리면서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죠. 촬영이 다 끝나고 나서 가족들과 간 여행에서 30년 만에 처음으로 수영장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영화에는 그가 참혹한 고문을 당한 뒤 칠성판 위에 누워있는 장면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한 장면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전라의 몸이 노출된다.

”그런 고문을 당하는 상태에서 뭔가를 걸치고 있다는 것도 부자연스럽지만 등급 문제도 있고 관객 정서상 받아들일 수 있는 수위를 고민해야 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장면은 꼭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부감샷(카메라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촬영방법)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을 때 ‘안 그래도 언제 찍나 생각했다. 괜찮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게 익숙하지가 않았지만, 촬영 회차를 거듭할수록 벗는 것에 익숙해져서 다 벗고 찍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죠. 칠성판 위에 고깃덩어리로, 사람으로서 요만큼의 가치도 남지 않고 갈기갈기 찢긴 채 살덩어리만 남아있는 상태를 보여준 겁니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잘 찍은 장면이고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 영화를 위해 몸무게를 10㎏ 이상 감량했고 고문 장면 촬영 때에는 밥도 거의 먹지 않았다.

”촬영하면서 영화 속 상황과 비슷한 조건을 만드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물고문 장면이나 노출 장면을 찍을 때에는 촬영장에서 밥을 안 먹었는데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가 자꾸 밥을 먹으라고 하니까 나중엔 짜증을 내기도 했어요. 고 김근태 의원의 수기를 보면 그 안에서 가장 미웠던 게 FM라디오 아나운서의 밝은 목소리였다는 얘기가 있는데 저도 다른 배우들이 옆에서 시시덕거리며 밥 먹는 모습을 보면서 어찌나 밉던지요(웃음). 고문 장면 촬영이 다 끝나고 다 같이 밥을 먹는데 그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는 영화가 개봉되면 열두 살짜리 큰아들과 손잡고 함께 가서 볼 거라고 했다.

”관람 등급이 15세 관람가로 나온 게 고맙고 반갑습니다. 어린 친구들도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 영화를 ‘기억에 관한 영화’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 자꾸 뒤돌아보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뒤를 돌아보는 게 불필요한 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과거와 기억은 현재, 미래와 실처럼 이어져 있어서 우리가 더 좋은 미래로 가고자 한다면 힘들고 불편한 기억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자꾸 되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지영 감독의 전작 ‘부러진 화살’이 사회적인 이야기를 코믹한 에피소드와 버무려 대중성이 컸던 데 비해 이번엔 무거운 이야기를 직선으로 풀어놓은 영화여서 홍보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

”이 힘든 영화를 관객 분들이 잘 버텨주실까, 힘들다는 생각으로 외면하면 어쩌나 지금도 사실 고민이 커요. 그래서 제가 어떤 식으로, 어떤 마음과 태도로 영화에 대해 얘기해야 할지 딱히 잡히지가 않아요. 영화가 직선인데 ‘곡선도 있어요’ 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느낀 그대로 솔직하게 다가가서 설득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진심으로 가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합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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