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너와의 거리 두기… 이토록 가슴 시렸던가

꽃등불 켠 섬진강 날 오라 손짓하네…구례·하동서 보내온 봄

봄이 오면 나를 부르는 강이 있다. 남도의 산과 들을 두루 적시며 흐르는 강, 섬진강이다. 내륙을 향해 봄을 알리는 꽃등불을 켜는 곳도 바로 이 강이다. 매화와 산수유가 다투어 피고, 강에 기대 사는 마을 어디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가 된다. 그러니 이맘때 섬진강 변의 전남 구례와 광양, 경남 하동 등으로 발걸음하는 건 봄 여행의 정석이자 진리다. 하지만 어쩌랴. 얄밉고 무서운 코로나19가 온 국민의 발을 꽁꽁 묶어 두고 있는 걸. 어디를 가 보시라 권할 수도 없는 걸. 그러니 아쉽지만 이제부터 전하는 이야기는 그저 남녘의 봄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워졌는지를 단순 전달하는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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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고 붉은 매화들이 흐드러진 광양 청매실농원 전경. 코로나19 탓에 찾는 이는 줄었지만 자연은 어김없이 제철의 절경을 펼쳐 놓았다.

봄꽃은 눈을 헤치고 달려온다. 멀리 지리산의 정수리가 희끗하다. 산 아래에선 봄을 재촉하는 비였지만, 산꼭대기에선 눈이 되어 내렸던 거다.

매화 향기 진동하는 곳, 광양으로 먼저 간다. 섬진강에 매달린 마을마다 매화가 폭죽 터지듯 피었다. 혹자는 늙은 매화의 고절한 멋에 견줄 수 없다고 하지만, 키 작은 매화 여럿이 모여 이같은 절경을 펼쳐내는 것도 여간 기특한 일이 아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청매실농원이다. 해마다 봄이면 많은 이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곳. 농원 뒷산 여기저기에 희고 붉은 매화가 흐드러졌다. 사진 몇 컷 찍자고 카메라를 들었지만 당최 뭘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할 만큼 매화들의 자태는 현란하다.

예전 이맘때면 매화 꽃잎만큼이나 사람이 많았다. 매화 축제 기간에만 100만명 이상의 상춘객이 몰려든다. 요즘은 확실히 다르다. ‘사회적 거리’를 둔 탐화객들로 듬성듬성이다. 코로나19는 정말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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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매실농원 뒤란의 대숲.

백운산 중턱의 전망대에 오르면 농원 전경은 물론 인근의 매화마을과 섬진강, 경남 하동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농원 뒤편엔 짧은 대나무숲이 있다. 매화와 어우러진 모습이 운치 있다.

섬진강을 따라 구례까지 가는 길은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로 꼽힌다. 한 굽이 돌 때마다 화사한 매화가 이방인을 반긴다. 조만간 벚꽃 시즌이 되면 이 강을 따라 또 한번 꽃들의 전쟁이 펼쳐질 터다. 지금의 고요는 그러니까 폭풍전야의 고요인 셈이다.

이 길에서 구안실(苟安室)을 만난 건 우연이었다. 독특한 이름에 끌려 찾은 곳은 뜻밖에 매천 황현(1855∼1910)의 사적지였다. 익히 알려졌듯, 매천은 절명시를 남기고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열혈 선비다. 이웃한 광양에서 출생한 매천은 구례에서 학문을 배우고 서울로 올라간 뒤, 1886년 낙향했다. 그 당시 터를 잡은 곳이 바로 구례 간전면 만수동이다. 여기서 그는 ‘구차하지만 그런대로 살 만하다’는 뜻의 구안실을 짓고 16년 동안 생활했다. 사실상 그의 시와 기록 대부분이 이곳에서 탄생한 셈이다. 안내판 역시 “그가 지은 시 1451수 가운데 400여수를 빼고는 모두 이곳에서 완성했다”고 적고 있다.

집 앞에는 샘도 팠다. 그의 호 ‘매천’이 이 샘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단칸 ‘일립정’(一笠亭)을 지어 벗들과 술을 나누고 시회도 열었다. 아쉽게도 지금 남은 건 바짝 마른 샘터와 낡은 안내판뿐이다. 구례군에서 사적지 조성 공사를 벌일 예정이라고는 하는데, 여태 버려진 듯한 모습에서 후세의 인심이 야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늙은 절집을 찾는 맛도 각별하다. 사성암은 오산(531m)의 기암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절집이다. 경내 풍경도 곱지만 무엇보다 절에서 굽어보는 풍경이 시원하다. 절집 앞 뜨락에 서면 너른 구례 들녘과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물줄기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구례 북쪽의 천은사도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명소다. 절집 들머리의 수홍루가 핫스폿이다. 홍예문 형태의 다리 아래로 흐르는 말간 물을 보면 가슴이 청량해지는 느낌이다. 극락보전과 명부전의 현판 글씨도 놓쳐선 안 된다. 둘 다 당대의 명필이었던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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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조루 큰사랑채의 누마루 풍경. 바깥 풍경을 잠시 빌리는, 이른바 차경의 그윽한 맛이 일품이다.

이제 곱게 늙은 한옥들을 영접할 시간이다. 토지면 오미동의 운조루(雲鳥樓)는 1776년 건축된 조선시대 전통 양반가옥이다.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른바 ‘남한 3대 길지(吉地)’ 위에 세워졌다는 집이다. 오래된 집이니 둘러볼 게 어디 한둘일까만, 큰사랑채 왼쪽의 누마루에는 반드시 앉아볼 일이다. 잠시 다리쉼을 하며 산수유꽃 흐드러진 바깥 풍경을 보는 맛이 아주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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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수유 곱게 핀 운조루 전경.

헛간에 있는 뒤주도 명물이다. 쌀 세 가마니를 담을 수 있다는 나무 뒤주다. 뒤주 아래 쌀 개방구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누구나 쌀 뒤주를 열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집 주인들은 대대로 뒤주에 쌀을 채워 마을의 굶주리는 이를 위해 항상 개방했다고 한다. 부잣집의 선한 영향력,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여기서 본다. 요즘처럼 나눔의 정신이 절실한 때에 많은 가르침을 주는 뒤주다. 동학, 한국전쟁 등 수없이 많은 위기 속에서도 운조루가 건재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타인능해’ 정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운조루 바로 앞의 곡전재, 쌍산재 등도 시간을 내 찾아볼 만한 고택들이다.

구례 하면 산수유다. 해마다 매화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었던 꽃인데, 따뜻했던 지난겨울 탓인지 올봄엔 예년보다 이르게 노란 꽃술을 열었다. 특히 지리산 만복대 자락의 산동면 일대는 노란 꽃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른 듯하다. 과연 산수유꽃의 성지라 할 만한 풍경이다. 단지 이를 보아 줄 사람이 적은 것이 못내 아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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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란 꽃구름도 보는 이 적어 아쉬운 듯…산수유꽃
우리나라 산수유의 성지처럼 여겨지는 구례 산동마을의 봄 풍경. 지리산에서 내려온 맑은 물이 흐르는 실개천 주변으로 노란 산수유가 활짝 피었다.

●세월이 내려앉은 검은 돌담과 허름한 농가들이 어우러진 산수유 마을

산동면에서도 가장 이름난 곳은 상위마을이다. 언덕에 차곡차곡 쌓인 다랑논과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개울이 산수유꽃과 어우러져 풍경화를 그려 내고 있다. 마을 안쪽의 오래된 돌담길과 산수유가 어우러진 풍경도 빼어나다. 상위마을과 이웃한 반곡마을은 이 풍경 덕에 ‘꽃담마을’이라고도 불린다.

더할 나위 없이 빼어난 봄 풍경이긴 한데, 어딘가 어색한 느낌도 든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고급진’ 집들과 값비싼 차들이 마을을 조금씩 점령해 가고 있다. 그 탓에 숨 쉴 공간 역할을 했던 공터는 사라지고 풍경의 주인이었던 꽃은 어느새 들러리가 돼 가는 모양새다. 언제 가도 늘 그러할 것 같았던 산수유 마을이지만 머지않아 지금 그러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산수유 마을들이 아름다웠던 건 꽃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월이 더께로 내려앉은 검은 돌담과 그 사이사이 들어찬 허름한 농가들이 꽃받침 노릇을 해 줬기 때문에 더 예뻤던 거다. 한데 돌담과 농가가 조금씩 사라지고, 그 자리에 현대식 집들이 들어차고 나면 그때도 마을 풍경이 온전할까 싶다. 산동면 주변에도 산수유 마을이 몇 곳 있다. 자그마한 저수지를 끼고 있는 현천마을이나 달전마을, 산수유 시목지가 있는 계척마을 등이 서정적인 풍경을 갈무리한 곳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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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화 사이사이 푸른 융단 펼쳐 놓은 듯 …야생 차밭
하동 덕은리 산자락에 조성된 차밭. 이맘때 화개면 일대를 찾으면 매화와 차밭이 어우러진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구례와 이웃한 마을은 경남 하동이다. 야생 차밭이 특히 인상적인 곳. 꼭 푸른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하다. 이맘때면 차밭 사이사이에 매화꽃이 핀다. 이리저리 휜 차나무 사이로 뿌리를 내린 매화의 단아한 자태가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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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차시배지에 세워진 주전자 모양의 조형물.

우리나라 차의 시배지로 알려진 화개면 일대에 야생차 재배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야생차박물관과 인접한 정금리, 운수리 일대와 덕은리 일대가 널리 알려진 곳이다. 정금리는 화개동천, 운수리는 쌍계동천, 덕은리는 덕은동천에 각각 속해 있다. 동천(洞天)은 산이 빙 둘러 있고, 가운데는 뻥 뚫린 공간을 말한다. 그러니까 세 곳 모두 가파른 산비탈에 조성된 차밭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대기와 빗물의 흐름, 토양 등 여러 여건들을 고려한 결과일 텐데, 이는 화개 일대가 오래전부터 차 재배에 적합한 땅이었다는 걸 일러 주는 방증이지 싶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되는 곳은 매암제다원이다. 이 집 마루에 걸터앉아 차밭과 함께 인증샷을 찍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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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쪽 섬진강 변에 조성된 재첩 모양의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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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쪽 섬진강 변에 조성된 재첩 모양의 조형물.

●평사리 들녘과 섬진강 내려다보이는 고소산성· 최고의 남해 전망대 금오산

고소산성은 평사리 너른 들녘과 섬진강의 물길이 내려다보이는 풍경 전망대다. 절집 한산사에서 산길을 20분쯤 걸어 올라야 닿는다. 굳이 산성까지 오르지 않고 한산사 어름에서 보는 풍경도 그 못지않게 멋들어지다. 한산사까지는 차로 오를 수 있다. 한산사 아래엔 ‘스타웨이’라는 상업시설이 최근 문을 열었다. 스카이워크로 이뤄진 전망대와 커피숍을 겸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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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 따라 붉은 수피는 철갑 두른 듯…소나무 숲
휜 채로 숲그늘을 떠받치고 있는 하동 송림의 늙은 소나무들.

하동 읍내에선 하동 송림(천연기념물 445호)을 잊지 말고 찾아야 한다. 1745년(영조 21) 도호부사 벼슬을 하던 전천상이 방풍림으로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아름드리 소나무 750여 그루가 섬진강을 따라 솔향 가득한 숲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소나무의 붉은 수피는 거북 등처럼 갈라졌다. 그야말로 ‘철갑을 두른 듯’한 모습이다. 솔숲 안에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솔향 가득한 숲을 천천히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솔숲 밖은 섬진강이다. 고운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다. 섬진강의 명물인 재첩 조형물도 세웠다.

이제 콧구멍에 바닷바람 좀 쐬어 줄 차례다. 최고의 남해 전망대 중 하나로 꼽히는 금오산을 찾아간다. 내륙에서 줄달음쳐 온 산줄기가 섬진강 끝자락의 망덕포구로 빠져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솟구친 산이 금오산이다. 고도는 849m. 바닷가의 산치고는 꽤 높은 편이다. 고룡에서 포장도로를 타고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6.3㎞를 오르면 산정에 가 닿는다. 한 굽이 돌면 지리산의 연봉들이, 또 한 굽이 돌면 남해의 섬들이 차창에 매달린다. 정상 바로 아래에 해맞이 공원이 조성돼 있다. 나무 데크 끝자락에 서면 발아래로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수려한 풍경이 일망무제로 줄달음친다. 왼쪽으로 사천의 섬들이 바둑알처럼 떠 있고, 그 옆으로 남해 창선도 등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져 있다. 햇살 받아 반짝이는 물비늘은 또 얼마나 고운지, 눈앞에 거대한 영화 스크린이 펼쳐져 있는 듯하다.

글 사진 구례·광양·하동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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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의 대표적인 음식 재첩국.

■여행수첩

-산채정식으로 유명했던 하동 쌍계사 앞 단야식당은 찻집으로 변신했다. ‘단야찻집’ 맞은편의 ‘팔모정’은 산채비빔밥으로 이름난 집이다. 재첩국을 주문해도 산채정식처럼 나물 반찬이 딸려 나온다. 하동 읍내 ‘대나무집’은 황태찜을 잘한다. ‘혼밥족’이라면 황태구이 정식을 맛보면 된다. 구례 ‘부부식당’은 다슬기 수제비로 이름난 집이다. 다만 오후 6시가 넘으면 문을 닫는다. 바로 이웃한 ‘목화식당’은 소 내장탕을 시원하게 끓여 낸다. ‘동아식당’은 가오리찜 등으로 진작부터 소문난 ‘전국구’ 맛집이다. 광양 쪽에서는 요즘 벚굴이 한창 나올 때다. 청매실농원 주변에 늘어선 대부분의 식당에서 맛볼 수 있다.

-사성암을 오가는 셔틀 버스는 코로나19로 운휴 중이다. 자신의 차로 오르거나 구례읍에서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 금오산 정상으로 가는 임도도 공사 중이다. 4월 말~5월 초 완공될 예정이다. 개인 차량은 통제되고 집트랙 이용객을 태운 승합차만 정상까지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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