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집으로/황수정 논설위원

빗방울이 한두 점 떨어지면 아까는 불러도 대답 없던 어머니는 어디선가 틀림없이 나타나셨다. 저만치서 보내는 손짓은 어서 빨래를 걷고 장독 뚜껑을 닫으라는 수신호였다. 딴 건 몰라도 나는 언제나 그 신호만은 찰떡같이 알아먹었다.

작가 이태준은 ‘무서록’에서 길을 가다 어느 집 부엌의 저녁 짓는 그릇 소리에 문득 내 집, 내 어머니가 그립다고 썼다. 그릇 소리에 꼬리표가 붙었을까마는, 간절한 옛 문장을 내내 기억하게 된다.

나는 장독 뚜껑 여닫는 소리에 고향집이 생각난다. 이즈음 우리 집 장독대의 단지들은 날마다 바람을 쐬었다. 금싸라기 볕에 장맛은 속속들이 단물이 들지 않고는 못 배겼다. 햇된장이 떫어질세라 따독따독 눌러서는 장독 주둥이에다 쨍쨍, 숟가락을 털고 하얀 광목으로 뚜껑을 싸매면 저녁 해가 기다렸다가 꼴깍 넘어갔다. 다정했던 숟가락 소리,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어머니가 떠나고 된장독을 열지 못했다. 장독에 볕과 바람을 들이는 요령을 이 나이 먹도록 나는 알지도 못한다.

묵은 된장독을 열어 오래 밀린 안부를 물어보고 오려 한다. 가을볕이 된장독에 잠기고 잠기다 지칠 때까지, 저녁이 목젖에 차오를 때까지, 떨어지는 대추알이나 실컷 주워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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