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개혁파’ 후야오방 서거 30주기에 쏠린 눈

윤창수 기자
윤창수 기자
업데이트 2019-04-15 16:06
입력 2019-04-14 22:36

갑작스러운 죽음이 中민주화 ‘톈안먼 사태’ 낳아… 유족, 공안감시 속 세미나·기념식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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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야오방 전 중국 총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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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주화 운동인 톈안먼 사태를 낳았던 ‘개혁과 청렴의 상징’ 후야오방 총서기의 사망이 15일 30주기를 맞는다. 홍콩 명보는 14일 후 전 총서기의 세 아들이 그의 고향인 후난성과 묘가 있는 장시성에서 당국의 감시 속에 열리는 세미나와 기념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30주기라는 점에서 어떤 규모와 형식으로 열릴지 주목된다. 또 이를 계기로 어떤 정치적 소요나 파장이 있을지도 주목된다.

그런 점에서 후 전 총서기는 여전히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10대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후 전 총서기는 대장정에 참여할 정도로 열성 당원이었지만 진보적인 사상 때문에 당내 보수파와 대립했다. 1989년 4월 15일 73세를 일기로 후 전 총서기가 사망하자 대학생 10만명이 톈안먼 광장 앞으로 쏟아져 나와 분노의 시위를 벌였다. 후 전 총서기에 대한 애도의 물결은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했고 같은 해 6월 4일 당국의 강제 진압으로 톈안먼 광장은 학생들의 피로 물들었다. 당시 학생들은 인플레이션 통제와 실업 문제 해결도 요구해 톈안먼 사태는 경제 문제가 민주화 열기에 불을 붙였다.

덩샤오핑이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자라면 후야오방은 개혁개방의 총책임자였지만 톈안먼 사태 이전 1986년 학생 시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서기 자리에서 불명예 퇴진했다. 총서기직에서 물러난 뒤 사망한 이후 후의 이름은 톈안먼 사태와 같은 민주화 운동이 재연될 것이란 당국의 우려 때문에 금기어가 됐다. 2015년 탄생 100주년 행사에 시진핑 주석이 참석하면서 후 전 총서기는 해금됐지만 톈안먼 사태를 뜻하는 6·4는 중국에서 여전히 철저히 금지되고 있다.

후 전 총서기는 마오쩌둥과 같은 독재의 폐해를 막고자 집단지도체제와 임기제도를 도입했지만 시 주석은 지난해 헌법 개정을 통해 영구 집권의 길을 열었다. 후 전 총서기의 친구였던 두다오정 전 신문출판서장은 “올해는 항일운동이자 제국주의에 반대한 5·4운동 100주년으로 후야오방은 5·4정신인 민주주의와 과학의 실천자이나 그 이상만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며 “민주주의와 과학이란 두 구호를 실현하려면 중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2019-04-15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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