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사의 입담에 흥행 좌우… 스카우트 싸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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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것처럼 무성영화 시대 변사라는 직업은 일본 흥행 산업의 산물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였던 조선, 대만 그리고 일본인 흥행업자들이 시장을 개척했던 태국과 만주에서도 존재했다. 조선에 변사가 전문직업인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하면서인데, 영화 상영 전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가 번갈아 등장해 한국어와 일본어로 각각 영화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이때 조선인 변사로는 서상호, 이한경, 김덕경이 활약했다. 이후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우미관과 일본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대정관과 황금관이 속속 등장하면서 변사의 해설도 언어별로 구분됐다.
무성영화 시대의 흥행 성적은 오로지 변사의 입담에 좌우됐다고 할 정도로 변사는 스타 중의 스타였다. 보통 변사들은 70~80원의 월급을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일류 배우가 40~50원의 월급을 받았고 고급 관리들의 월급이 30~40원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변사들의 대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미관의 주임 변사로 유명했던 서상호가 1918년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개관하며 스카우트된 것처럼 변사는 무성영화 흥행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사가 전성기를 구가한 무성영화 시기 단성사의 주임변사 서상호, 조선극장의 김조성, 우미관의 이병조가 3대 변사로 꼽혔고, 우정식·서상필·김덕경·성동호 등도 이름을 날렸다.
2019-02-12 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