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집회와 함께한 ‘영정’ 우리 곁 떠난 김순옥 할머니

이하영 기자
업데이트 2018-12-05 18:08
입력 2018-12-05 18:04

일본군 성노예 피해 생존자 26명뿐

‘돈벌이’ 속아 中으로…2005년 귀국
피해 규명 앞장…“이젠 고통 멈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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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서울 종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364차 일본군 성 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집회’에서 이날 오전 노환으로 별세한 김순옥 할머니의 영정이 추모 화환과 함께 놓여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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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능욕의 세월을 참고 견뎠던 일본군 성 노예 피해생존자 한 분이 또 세상을 떠났다.

5일 김순옥(96) 할머니가 오전 9시 서울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정부가 2015년 한일합의로 출범시켰던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한다고 공식발표한 지 딱 2주 만이다. 올해 들어서만 할머니 6명이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남은 생존자는 26명뿐이다.

이날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364차 일본군 성 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는 김 할머니의 영정이 함께했다. 집회에서는 할머니의 뜻을 기리겠다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참가자들은 “소녀의 짓밟힌 청춘은 우리 가슴속에 되살아난다”, “고통의 눈물을 멈추고 이제는 해방의 기쁨을 누리세요”라고 외치며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했다.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 겨우 일곱 살 나이부터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열여덟 살이 되던 1940년 공장에 취직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소문에 속아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으로 훌쩍 떠났다. 그러나 김 할머니가 도착한 헤이룽장성 석문자 위안소에서 그는 속절없이 성 노예 피해를 당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종전이 찾아와 해방된 이후 김 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중국인과 혼인해 중국 둥닝에 정착했다. 이후 한국정신대연구소, 나눔의 집 등이 수년간 김 할머니의 국적 회복을 위해 노력한 결과 2005년 결국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해 나눔의 집에 입소했다. 안신권 나눔의 집 소장은 “김 할머니는 밝은 성격으로 수요집회를 비롯해 위안부 피해 규명 활동에 늘 앞장섰다”면서 “다음 세대가 이 문제를 잊지 않도록 교육을 계속해 나가기를 바라셨다”고 회상했다.

김 할머니의 활약은 눈부셨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수요시위 및 증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2013년에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민사조정을 신청하기도 했다. 또 주한 일본 대사관 소녀상에 말뚝 테러를 가한 스즈키 노부유키와 피해 할머니들을 비하한 일본 록밴드 ‘벚꽃 난무류’, 그리고 소설 ‘제국의 위안부’로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한 박유하를 고소했다.

이날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은 김 할머니의 사망에 깊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 진 장관은 “지난 10월 나눔의 집에 방문해 김 할머니를 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별세 소식을 접해 무척 마음이 아프다”면서 “여가부는 피해자 한 분 한 분을 더 성심껏 보살필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발인은 7일, 장지는 나눔의 집 추모공원이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2018-12-06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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