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혁명의용군 조작 사건, 해방 후 친일파 군부 보호의 신호탄이었다

여전히 살아있는 ‘광복을 저격한 칼날’

지난 5월 4일 ‘일베’ 게시판에는 이런 제목의 ‘뉴스’가 떴다. “탁현민 뒤를 졸졸 따라다닌 육사 교장 김완태(중장)/백선엽 장군 기념관 없애.” 출처는 박근혜 인터뷰로 유명한 ‘정규재TV’로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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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정부는 광복군 출신인 이범석 초대 국방장관의 지원에 힘입어 국군 내부의 눈엣가시들이던 좌익계열 외에 광복군·학병 출신, 친일파를 혐오하는 중간계열의 장교 등을 광범위하게 숙청하기 위해 ‘혁명의용군 사건’을 조작했다. 사진은 군이 좌익 혐의자들을 처형하는 장면.

“육군사관학교가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기념 비석을 빼서 야산에 방치” “박근혜 대통령 기념 물건 모두 폐기” “백선엽 장군 기념관 없애고” “육사의 기원은 조선 독립군이라 역사 바꾸며” “탁현민(청와대 행정관) 방문 때 3성 장군(김완태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뒤를 졸졸”.

육사총동창회(회장 김병관)는 감사단을 편성해 육사로 ‘파견’했다. 이른바 감사단은 육사 안 교회에 진을 치고 김완태 교장을 비롯해 관계자들을 오라 가라 하며 따졌다. 당시 무자격 감사단의 강짜가 얼마나 심했던지 교회가 이들에게 ‘퇴거’를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확인 결과 소문은 모두 가짜였다.

그러나 김완태 교장은 지난 5월 말 결국 경질됐다. 수도군단장 시절, 훈련 중 물의를 빚은 예하 부대의 노모 중령에 대해 경징계를 찾아내 집요하게 문제 삼은 결과였다. 이들의 회를 뒤집은 것은 육사의 기원 문제. 김 교장은 육사의 정통성을 신흥무관학교나 임시정부 육군무관학교 등 독립군의 전통 속에서 새로이 세우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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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군 대상에 포함돼 처형된 김종석 중령의 모습. 김 중령은 오일균, 최남근 등과 함께 일본군 장교 출신이지만 중간계열의 상징적 인물로, 미 군사고문관 하우스만이 구명에 앞장설 정도로 유능한 인재였다.

육사는 지금까지 그 뿌리를 미군정(美軍政)이 설립한 남조선경비사관학교에 두었다. 이 학교의 전신은 미군정 군사영어학교. 육사가 이렇다 보니 국군 역시 연원을 미군정이 설립한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두었다. 1946년 1월 15일에 출범한 경비대는 군사영어학교 출신 장교 110명으로 출범했다. 이 가운데 87명은 일본군 출신, 21명은 일본의 괴뢰국 만주군 출신이었다. 1, 2대 사령관은 일본군과 만주군 장교였던 이형근과 원용덕이었다. 이형근의 장인 이응준(일본군 육군 대좌 출신)은 미군정 군사 고문이었다.

미군정은 1946년 말 통위부장(미군정기 국방장관)과 경비대사령관을 유동렬(광복군 총참모장)과 송호성(광복군 훈련처장) 등 독립군 출신으로 교체했다. 독립군을 우대한 것이 아니라 여론 때문이었다. ‘이게 일본군이지 대한민국 군대인가!’ 제1연대에선 “이 따위 경비대 해산시켜라. 빨갱이 노랭이 같은 놈 몰아내라”며 소요사태가 벌어졌다. 놀란 이응준은 미군정에 수뇌부를 광복군 출신으로 임명하자고 제안했다.

유동열·송호성 체제는 서둘러 독립군 출신을 특임 장교 형태로 충원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경비대의 뼈대는 이미 일본·만주군 출신 장교들이었다. 정부 수립 후엔 이런 노력마저 제동이 걸렸다. 초대 국방장관이 광복군 제1지대장 이범석이었지만 그는 김구와 각을 세우고 있었다. 광복군 출신은 대부분 김구 계열이었다. 그는 초대 총참모장에 이응준, 육군사령관에 이형근을 앉혔다. 이들에게 김구 계열의 광복군 출신들은 눈엣가시였다. 광복군 출신들은 친일파 청산을 물고 늘어졌다.

게다가 제헌국회가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법을 제정, 공포했으며, 10월 22일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반민특위)를 설치했다. 총참모장, 육군사령관 등 핵심 간부는 형사처벌을 당하거나 경질돼야 했다. 조병옥, 장택상 등이 장악하고 있던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특별법 공포 후 6일 뒤인 9월 28일 독립군 출신의 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체포됐다. 사흘 뒤 최능진 전 경무부 수사국장 등이 체포됐다. 10월 5일자 도하 각 신문엔 이런 경찰 발표가 실렸다. “1일 오후 3시경 최능진, 서세충, 김진섭 등이 수도청 형사대에 체포됐다. 지난해 11월경부터 국군 소령 오동기 등과 공모하여 국방군속에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현정부를 붕괴시키려 한 바, 군자금으로 15만원을 제공한 혐의라 한다.” 해방 후 첫 조작사건인 ‘혁명의용군 사건’이다. 친일 군부와 경찰이 합작한 ‘숙군’의 신호탄이었다. 그 칼날은 정치권까지 겨냥하고 있었다.

오동기는 항일전선에 투신했던 독립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경비대 감찰총감직에 있으면서 군내 일본군 출신 장교들의 부패를 단호하게 처리하려 했다. 상층부와 사사건건 마찰을 빚다가 결국 야전으로 밀려났다. 좌익에 대해서도 단호했다. 14연대장 시절, 김지회 중위를 요시찰 인물로 찍어 작전과장에서 포병중대장으로 전보시켰다.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다.

최능진은 일제 치하에서 2년간 복역한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 소련군의 압박을 피해 월남했다.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경찰 내 친일파 청소를 주장해 친일경찰의 대부 조병옥 경무부장, 장택상 수도청장과 마찰을 빚었다. 두 사람은 노덕술, 이익홍, 최연, 최운하, 김정빈, 김홍걸, 백원교, 박경후 등 일제의 조선인 악질 경찰관들을 요직에 앉힌 터였다. 최능진은 10·1 대구사건을 계기로 미군정 당국에 조병옥과 장택상의 처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5·10선거 때는 동대문 갑구에 입후보한 이승만을 낙선시키기 위해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려다 정권의 방해로 실패했다. 두 사람은 군과 경찰의 상징적 민족주의자였다. 그 둘을 좌익과 연계한 내란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엮은 것이다.

10월 19일 14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21일 이범석 국무총리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 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 이튿날 김태선 수도청장은 ‘혁명의용군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주모자 최능진, 오동기, 서세충, 김진섭 등이 남북 노동당과 결탁해 (그들이) 숭배하는 정객을 수령으로 공산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으로 …이번 여수 사건을 야기했다.” ‘극우 정객’이란 김구였다.

이후 군과 경찰 친일파들은 반민특위 무력화와 군내 민족주의 계열 제거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이승만은 물론 광복군 출신의 이범석 총리가 지원사격을 하고 있었으니, 거칠 게 없었다. 만주특설대 출신의 백선엽 국장의 지휘 아래 육군 정보국은 1949년 7월까지 전체 국군의 10%에 이르는 4700여명을 제거했다. 이 중에는 좌익 외에 광복군, 학병 출신 등 친일파를 혐오하는 중간계열이 광범위하게 포함돼 있었다. 심지어 송호성 사령관도 끼어 있었다.

처형된 장교 중 김종석, 오일균, 최남근 등은 일본군 장교 출신이지만, 중간계열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김종석, 오일균은 미 군사고문관 하우스만이 구명에 앞장설 정도로 유능한 인재였다. 그러나 ‘진짜 남로당원’ 박정희가 일관되게 두 사람을 군내 좌익 책임자로 몰아 구할 수 없었다. 그때 박정희에게 ‘스네이크(독사) 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4연대장이었던 최남근은 반란군에 잡혀 고초를 겪다가 탈출했지만, 다시 진압작전에 나서라는 요구에 ‘동족에게 총을 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들은 형장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죽었다.

군내 숙청이 정리되면서 군은 정치권을 정조준했다. 육군 헌병대는 1949년 5월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을 수사했다. 친일파 처단을 앞장서 주장해 온 소장파 10여명을 국제공산당 프락치로 몰아 처벌했다. 국회가 얼어붙자 경찰은 6월 6일 반민특위를 습격해 특경대를 무장해제했다. 이승만은 10일 반민특위 해체를 명했다. 13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군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체의 파괴행동에 대해 용서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군의 정치개입 선언이었다.

그로부터 13일 뒤 육군 정보국 소속 포병 소위 안두희는 김구를 암살했다. 이른바 ‘숙군’의 대단원이었다. 당시 수사본부장으로 헌병대 실세는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으로서 경찰 최고직위에 올랐던 전봉덕이었다. 의열단 출신에 중국군 상위였던 장흥이 사령관이었지만 실권이 없었다. 장흥은 김구 암살 다음날 경질됐다.

잔불 정리만 남았다. 이범석은 ‘숙군’에 앞장섰지만, 순망치한의 화를 자초했다. 광복군 계열이 정리되자 그의 사조직 대한민족청년단(족청)도 이승만의 압박으로 해체되면서 국방장관에서 밀려났다. 전쟁 발발 이후 내무장관으로 기용돼 ‘부산정치 파동’에서 크게 이용당한 뒤 결국 ‘팽’당했다.

이른바 ‘숙군’으로부터 70년 뒤, 군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려는 작업이 육사에서 시도됐다. 그러나 불과 7개월여 만에 지휘관은 정치적으로 ‘저격’당했다. 더러운 ‘숙군’의 칼날은 여전히 자주와 독립을 겨냥한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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