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민 기자의 월드 why] ‘기억 지우개’ 당신도 필요한가요

송혜민 기자
업데이트 2017-12-02 03:43
입력 2017-12-02 03:40

삶을 갉아 먹는 트라우마 극복하기

전기·가스로 뇌 자극해 공포감 삭제
‘제논 가스’로 새로운 기억 만들기도
세계 각국 연구진 연구결과 쏟아내
20년 전 시작된 ‘가상현실 치료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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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테러와 강력범죄, 자연재해에 노출된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나쁜 기억’을 얻고 치유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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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끔찍한 범죄와 테러, 자연재해 등에 시시각각 노출돼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원치 않게 겪은 경험과 기억은 뇌에 강제 저장되고, 이러한 나쁜 기억은 인간의 일상을 어지럽히고 망친다.

전쟁을 겪은 군인은 고막을 울리는 큰 소리만 나도 갑작스럽게 주변 사람을 공격하거나 불안에 떨고, 성폭행을 겪은 여성은 사람들로 붐비는 길거리에서 남성과 스치기만 해도 공포와 두려움에 무너져 내린다. 지진과 화산으로 가족의 울타리를 잃은 아이, 교통사고로 신체 일부를 잃은 운전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지워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를 그날의 기억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기억은 결국 트라우마가 되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발전한다.

우리 뇌에서 나쁜 기억을 저장하고 이것을 트라우마화(化)하는 데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는 부위는 대뇌에 있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다. 편도체가 손상된 인간과 일부 동물은 감정, 특히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 예컨대 편도체 또는 편도체의 시냅스(2개의 신경세포가 접합하는 부위)가 망가진 쥐는 고양이가 자신을 잡아먹는 그 순간까지 공포를 느끼기는커녕 장난을 친다. 이러한 발견을 토대로 세계 각국 연구진은 뇌의 특정부위를 전기 또는 레이저, 가스로 자극해 공포심 또는 공포심을 준 나쁜 기억에 대한 공포를 억제하고, 더 나아가 이를 지울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 연구진은 2014년 제논 가스에 노출된 쥐들에게서 공포를 느끼던 환경에 대한 반응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무색·무취의 불연성 기체인 제논 가스는 의료용부터 가구 제작까지 폭넓게 사용되는 가스인데, 이것에 노출되면 공포의 기억과 관련된 특정 단백질 수용체를 차단해 나쁜 기억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된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제논 가스가 뇌가 해당 기억을 완전히 차단하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이다.

이 밖에도 레이저나 전기 자극을 나쁜 기억 지우개로 활용하면 트라우마를 완화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는 쏟아지고 있지만, 대부분은 쥐 등 동물을 이용한 실험이다. 두개골을 열고 복잡한 회로로 이뤄진 뇌에서 ‘공포기억 저장소’를 찾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보다 완벽하고 안전한 나쁜 기억 지우개를 찾는 사이, 지금 이 순간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쁜 기억과 연관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트라우마로 인한 PTSD는 시각과 청각, 촉각, 미각 등 다양한 경로로 발현되며 이는 한 사람의 일상을 완전히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영국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연구진이 지난해 50대 이상 성인 459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어린 시절 학대나 따돌림 등의 경험으로 트라우마가 생긴 사람일수록 노화 및 수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다양한 트라우마적 문제들이 몸에 각인처럼 남고, 이것이 텔로미어의 길이를 짧아지게 해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것. 자녀의 죽음이나 목숨을 위협하는 사고 또는 질병, 신체적 공격 등의 외상적 사건을 겪은 여성은 이러한 사건을 겪어보지 않은 여성에 비해 비만이 될 위험이 11% 높다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연구결과도 있다.

수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나쁜 기억을 지우는 것에 있어서 최근 각광받는 기술이 바로 ‘가상현실 치료’다. 1990년대 중반에 처음 시작된 이 치료법은 과학의 발전으로 더욱 현실감이 높은 가상현실을 만들어냄으로써 전쟁 및 테러 생존자들에게 꾸준히 실시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쁜 기억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이를 뛰어넘게 도와주는 주위의 손길이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 처방에 따른 약물의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럽거나 감춰야 하는 또 다른 비밀이라고 인식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망각을 두고 ‘신의 선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때로는 망각이 기억보다 더 나을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다고 다 잊혀졌을 거라는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이미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세월호 참사나 경주·포항 지진 피해자들에 시간은 단순히 숫자에 불과하다. 기억, 그것도 나쁜 기억의 생명력은 생각보다 질길 수 있다. 망각은 신의 선물일 수 있지만, 그 선물을 언제, 어떻게 받고 쓸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 그 자신이다.

huimin0217@seoul.co.kr
2017-12-02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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