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희 기자의 B컷 월드] ‘미투’를 넘어서

입력:11/14 17:34 수정:11/14 17:50

▲ 김민희 국제부 기자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이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은 ‘말을 하려다 마는 것’이다. 엠티 술자리에서 자신을 ‘씹다 버린 껌’이라며 성적으로 비하한 선배에게 대꾸를 하려다 입을 다물고,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는 안 받지만 취업준비생이라 태워 줬다는 택시기사에게 항의하려다 그냥 눈을 감아 버린다. 82년생 김씨인 나는 왜인지 안다. 이 정도의 자잘한 차별과 비하는 하루에 몇 번이고 발생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정색하고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싸운다고 해도 상대방을 바꾸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남은 선택지는 참는 것뿐이다.

170쪽 남짓한 소설의 36페이지를 넘기면서부터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애써 묻어 뒀던 불쾌한 기억들이 마음속의 빗장을 열어젖히고 앞다퉈 쏟아져 나왔다. 수습기자인 나를 아가씨라고 불렀던 경찰, 취했다는 핑계로 어깨와 허리로 손을 밀어 넣던 취재원, 임신한 내 앞에서 “여자들은 애가 생기면 파이팅이 떨어져”라고 말하던 타사 선배….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미투(#Me Too) 캠페인’을 지켜보면서 나는 82년생 김지영을 떠올렸다. 한국의 지영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가부장제에 찌든 한국보다는 사정이 나을 줄 알았던 미국, 프랑스, 영국의 지영이들도 고통받고 있었다. 웬만한 남성보다 많은 돈과 권력을 지닌 귀네스 팰트로, 앤젤리나 졸리 같은 셀러브리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겪은 성범죄를 SNS에 고백해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우자며 지난달 15일 영화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제안한 미투 캠페인은 전 세계 여성들의 침묵을 깼다. 그동안 겪어 온 부당함에 맞서 싸우겠다는 기세로 이 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그런데 여성들의 열기에 비해 사회의 시선은 뜨뜻미지근하다. 언론만 해도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미투 캠페인에 관심이 식은 듯하다. 이 운동이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라는 단선적 논리로 작동하는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해자로 지목돼 줄줄이 직장을 잃는 고위 관료, 교수, 국회의원들을 보며 여성에게 일상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남성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새삼 놀라게 된다. 여성들은 통쾌함을 느끼지만 남성들은 위기의식에 빠진다. 어느샌가 미투 캠페인은 여성과 남성의 대결 구도로 자리잡은 듯하다.

그동안 크고 작은 여성운동이 좌절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페미니즘의 확장성에 대해 고민해 왔다. 미투 캠페인이 ‘여자들끼리의 운동’으로 치부돼 명멸해 간 수많은 운동의 전철을 밟을까봐 두렵다. 이제는 ‘미투 너머의 미투 캠페인’을 고민할 때다. 성범죄는 남녀 간 문제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이를 착취하는 권력 남용이다.

이것이 용인되는 문화와 사회적 제도에 잘못이 있다. 잘못된 문화와 제도를 바꾸는 게 이 운동의 지향점이어야 한다. 단순히 가해자 저격으로 끝난다면 미투 캠페인은 오래갈 수 없다. 성범죄뿐 아니라 모든 ‘갑질’에 대한 투쟁으로 외연을 넓히는 것을 제안해 본다. 여성을 비롯한 세상의 ‘을’들이 연대해 목소리를 내고, 권력에 의한 범죄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를 만든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 같다.

har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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